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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한국 제안하는 한국

조샙 콘래드의 저 유명한 소설 '어둠의 심연'은 백인 우월주의와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고발하며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들, 게임, 문학, 음반 등 문화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이 소설이 1970년대 나이지리아의 작가 치누아 아체베 에게 해체되었던 사건은 문화계를 뛰어넘어 불어올 더 큰 파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아체베는 이 소설이 아프리카의 야만성을 단정하고 백인 우월주의와 제국주의가 '아프리카의 흑인만큼이나 야만스럽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아프리카는 서구 문학계에서 '말해지고 있다'라는 것을 폭로했다. 외부의 시선으로 서구 문화계에서 재현되던 아프리카는 아체베의 말마따나 서구 문화 내부의 야만성을 제기 위한 척도로 사용되었을 뿐, 그 광활한 대륙에서 수천 년간 뛰던 심장 박동들을 재현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와 같은 아체베의 소설들이 호응을 얻고 전 세계적인 고전의 반열에 오르면서 비로소 '말하는 아프리카'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소설들에서 아프리카는 유럽인의 시각으로 그려지는 야만의 땅이 아닌 독자적인 미학과 규범, 문화, 생활 양식을 지닌 역사의 땅이었다. 이곳에서 아체베의 소설 속 인물들은 아프리카인으로 아프리카를 말했으며 그 영향력은 단순히 탈식민주의 문학의 부흥을 넘어 아프리카와 같은 비서구권 문화에 대한 재고를 촉진했다. 이런 말 해지는 아프리카에서 말하는 아프리카로의 이동이 해외에서 알려지는 한국의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고찰에 무언가 빛을 던져 줄 수 있지 않을까? 이 지면을 빌려 필자는 부족한 글솜씨로나마 해외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변해온 과정과 미래를 위한 지속 가능한 이미지로의 개선 방안을 고민해 보고자 한다.
치누아 아체베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 무대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특히나 필자가 머물고 있는 북미권에서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있지 못했다. 남북으로 분열된 이 동양의 작은 나라는 어디까지 냉전에 관한 역사 수업에서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읽을거리' 였거나 발전된 일본 옆에 있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1970년대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한국이 국제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조차 한국의 이미지는 한국이 내는 역사적 구성물로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성장의 잠재력을 가진 나라로서 경제적 논리에 의한 분석 대상이었으며 그 외에는 여전히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유명무실했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태권도의 전파가 한국을 널리 알리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기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해외 문화 매체에서 한국은 중국의 쿵후, 일본의 검도와 같이 서구에는 없는 무술을 구사하는 동양의 신비로운 나라로 소급되었다. 또한, 태권도 자체가 한국 전부를 대변해 버리는 기표로 대치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가뭄에 콩 나듯이 등장하는 대중문화 속 한국의 이미지는 대부분 태권도 도복을 입은 무술인인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이는 태권도가 가진 파급력의 태생적 한계로 보는 것보다는 국제 문화 교류에 미흡했던 국가적 상황과 서구권에 내재하던 담론의 한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당시 한국의 이미지를 구성하던 해외 매체들에 중요했던 것은 태권도와 그와 관련된 문화 등이 아니었다. 태권도는 '동양의 무술'로써 거대한 오리엔탈리즘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의 메커니즘은 어디까지나 나와 너의 구별을 위한 이항 대립에 근거하는바, 서구와 동양이 구분되는 순간 더 이상의 미분은 요구되지 않았고 행해지지도 않았다. 이 거대한 개념 기계 속에서 중국과 한국, 일본은 구별되지 않고 섞여 있었다. 한국은 여전히 말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의 4마리 용, 이 시기 한국인이 묘사되던 방식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K-POP, K-Drama, E-sports, 한식과 같은 이른바 한류가 불러일으킨 열풍이 어느 순간 갑자기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분명 장기간에 걸친 국가 차원의 지원과 수많은 개개인의 노력에 힘입은 결과이다. 다만 주목해 볼 점은 이때부터 말해지는 한국에서 벗어나 말하는 한국이 국제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의 부품으로서 서구와 동양을 구별하기 위해 흐릿하게 존재하던 한국은 '한국'으로서 정체성을 수출하기 시작한다. 태권도를 비롯한 제한된 텍스트들이 서양의 손에서 재생산되던 종전의 방식에서 자국의 역사, 문화, 생활 양식 등을 직접 홍보하고 생산하여 배포한 것이다. 북미와 유럽에서 직업 게이머의 인식조차 희박했을 때 한국은 E-Sports 경기에 10만 명의 관중을 동원하며 새로운 스포츠 장르를 건설했고, 수많은 음악 장르의 통합과 보는 음악으로 빠르게 변환한 K-POP은 더 이상 마이너 음악 장르가 아닌 젊음을 표기하는 세계적 코드가 되었다. 중국 일본 등의 유교 문화권에서 큰 호응을 바탕으로 성장한 K-Drama는 북미와 유럽의 스타일을 흡수하며 세계적인 문화 콘텐츠로 입지를 굳혀 가고 있으며, 한국형 인터넷 개인 방송은 유튜브의 성장을 타고 새로운 콘텐츠(Muck bang)를 만들어 냈다. 해외의 여러 인터넷 포럼과 문화 콘텐츠에서 한국은 더 이상 하나의 이미지, 혹은 안개처럼 뿌연 동양적 환상만으로 대변되지 않는다. 이제 한국은 첨단 산업을 통한 과학 국가, 끊임없이 역동하고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변화하는 국가, 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국가 등 한층 다양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들로 인식된다.
E-sports 기원지로서 한국
이처럼 해외에서 인식되는 한국의 이미지들은 최근 10년간 엄청난 속도로 변해왔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한층 더 고양할 가능성을 보았으며, 그 가능성을 좇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타자에 의해 말해지는 주체에서 벗어나는 것 뒤에 또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내게 주어진 이 기회를 통해 감히 '그렇다'라고 말해보고 싶다. 필자의 좁은 식견으로 한국은 말하는 한국에서 '제안하는 한국'으로의 도약을 꿈꾸어야 하며 그럴 가능성을 충분히 내재하고 있다.

우선 말하는 한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필요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스스로 말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그 자체로 이항 대립을 이용한 구별의 논리를 배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항 대립을 통한 말하는 위험성에 더 취약하고 쉽게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이다. 타자는 가지지 못한 우리만의 고유한 것, 타자보다 더 뛰어난 우리의 것 등과 같은 담론은 아직 문명의 그늘에서 서성이는 선형적 역사 발전론이나 엇나간 민족주의 담론과 쉽게 결합한다. 이런 이항 대립에 근거한 말하기는 자연스럽게, 혹은 은밀하게 타자를 깎아내리는 오리엔탈리즘의 메커니즘을 재현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을 둘러싸고 일본의 미디어가 일본어의 우수성을 알리던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영어는 침이 많이 튀는 반면 일본어는 침이 작게 튀는 뛰어난 언어이기에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을 늦을 수 있었다는 억지를 보라. 이런 종류의 말하기는 일본이 아닌 것을 은근슬쩍 깎아 내리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일본적인 것의 이항 대립에 근거한다. 내집단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야만적 외부, 그에 근거한 자긍심. 이것이 그 옛날 서구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야만을 전제하던 유럽 중심주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런 이항 대립에 근거한 이미지의 범람은 이번 일본의 예시가 그러했듯 세계적인 공분을 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껏 쌓아왔던 국가 가치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 이른바 '국뽕'이라 불리는 자문화 중심주의 이미지들의 전시가 한국에서도 점차 나타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유튜브에는 자극적이고 인위적인 이항 대립에 근거한 한국 자랑 콘텐츠들이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으며, 때때로 그런 채널들은 외국인을 동원하기까지 한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국뽕'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비판적 어감이 말해주듯, 이러한 이항 대립에 근거한 국가 이미지의 생산이 한국 사회 내부에서 비판적 시선으로 조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말하는 한국에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한국이라는 국가 이미지를 단순한 문화 상품이 아닌 세계적 담론의 생산지로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하고 구체적인 한국의 이미지,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코로나19 대처
제안하는 한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적인 필요에 대한 해답, 혹은 해답에 대한 필요를 제안할 수 있는 담론 생산자, 혹은 공급자로서의 한국을 말한다. 2020년의 한국은 발전된 선진국으로서 개발 도상국들 에게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과 발전상의 부작용에 대한 경고를, 여타 다른 선진국들엔 초국가적으로 공유되는 국제 문제에 관한 해결책 혹은 문제의식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사실 먼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을 일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내고 있는 일이다. 또한 앞으로 더 발전할 충분한 가능성이 이미 한국이라는 이미지가 해외에서 재현되는 방식 속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시로 코로나 사태로 새롭게 조명받은 한국의 대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입국 차단과 시민 격리를 통하지 않고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을 완벽에 가깝게 통제하고 있는 나라이다. 한국산 진단 장비는 러시아와 미국 등 106국에 수출되었고, 이 진단 장비는 유럽에서 시행된 모든 검사의 70%를 책임졌다. 현재 전 세계 대부분 국가의 코로나 검역 체제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요소가 한국산 진단 장비이다. 뿐만 아니라 마스크를 비롯한 방역 물자들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한국의 방역 물자 지원을 요청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자국의 필요를 충당한 방역 물품을 해외 여러 국가에 원조하고 있다. 진단 장비와 방역 물품, 공세적 추적-방역을 통한 검역 과정과 해외 자국민 호송, 6.25 참전 용사나 해외 입양아들에 대한 마스크 지원 등의 한국적 방법은 코로나 19에 대항하는 유일무이한 교리가 되었다. 코로나 사태로 주목받게 된 '한국의'이라는 형용사는 신한류 열풍과는 약간 다른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한류가 문화 시장에서 소비되고 유통되는 상품으로서 세계에 어필했다면 코로나 사태 속에서 한국은 초국가적 재해에 대항하는 매뉴얼을 세계에 제안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여타 K-POP 그룹과 차별되는 어마어마한 팬덤을 가진 BTS의 인기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심리와 자의식을 대변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BTS는 그들의 음악을 통해 억눌리고 소외당한 경험을 가진 젊은이들이 필요로 하던 것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나 사회의 통념에 맞서는 법을 음악의 형식으로 제안해 주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2018년에 이루어졌던 한국의 대규모 촛불 시위는 전 세계의 수많은 민중에게 평화적 시위를 통한 민중 주권의 회복이 가능하다는 일종의 희망찬 선례를 제안해 줬으며, 이는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분노한 미국의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서도 회자하였던 바이다. 칸과 아카데미에서 진가를 인정받은 '기생충'은 해답에 대한 필요를 제안할 수 있는 한국의 예시가 될 것이다. 영화는 한국과 같은 발전된 선진국들이 공통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회 양극화에 대한 담론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전 세계의 관객들은 그 국적만큼이나 다양한 반응을 쏟아 내었으며, 이 초국가적 문제에 대한 담론은 국경을 넘어 대중문화 차원에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세계적 담론을 제안할 수 있는 한국의 예시는 사실상 우리가 밟아왔던 과거의 모습에서 잠재 태의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은 말해지는 한국에서 말하는 한국으로의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한국은 더 이상 동방의 작고 중요하지 않은 나라, 냉전의 역사 한 귀퉁이에 있는 불운한 나라가 아니다. 더 이상 타자의 시선에서 왜곡된 형태로 재생산되는 나라도 아니다. 고유한 정체성과 독자적인 이미지를 가진 하나의 브랜드로서 한국은 21세기 국제무대에서 혁신, 젊음, 민주주의, 유연함, 첨단 기술과 같은 기표들로 연상된다. 이러한 말하는 한국은 이를 이룩하기 위해 헌신했던 모든 개개인과 이들을 지원했던 국가 정책들이 없었더라면 결코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노력으로 만들어진 가능성의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행운이면서도 무거운 책임으로 다가온다. 이항 대립에 근거한 인위적 자긍심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가 내재한 새로운 한국의 가능성을 피워내는 것. 새로운 시대의 목표라고 부를 수도 있을법한 이 명제는 괜히 복잡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이루어낸 결과들과 그것이 세계에서 이끌어내는 반응을 본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지금껏 잘해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잘해가지 않겠는가? 그렇게 믿으며 부족한 글을 줄인다.
북미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6시간 만에 15000개의 추천을 받은 사진

[장려상]
김준영

(활동국가: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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