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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

한국의 전통놀이 - 1

한국 전통놀이의 역사

전통놀이의 정의

전통놀이는 근대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각 지방의 풍속과 생활모습이 반영되고, 민간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여러 가지 놀이를 뜻한다. 전통 놀이에서 '전통'은 "세대에서 세대를 걸쳐서 가치 있는 것으로 보존되고 전승되어 온 사회적 유산"으로 정의할 수 있다. 또한 놀이는 '노동'에 해당하는 활동을 제외한 모든 신체적·정신적 활동이며, 그 성격은 생활상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목적이 없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즐거움과 흥겨움을 동반하는 데에 있다.

한국어에서 '놀이'는 '놀다'의 어간 '놀'에 명사형 어미'이'가 붙어서 이루어진 말이다. '놀다'라는 동사는 여러 가지를 의미하는데, 소극적으로 일을 하지 않고 쉰다는 휴식의 뜻이 있는가 하면, 재미를 즐기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일정한 놀이 활동을 한다는 뜻이 있다. 따라서 '놀이'는 포괄적으로 휴식의 뜻과 함께 재미를 즐기기 위하여 놀이 활동을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한국의 전통놀이란 한국이라는 지역적 공간 안에서 세대에서 세대를 걸쳐 전승되어 행해져 온 놀이 활동을 의미한다.

한국 전통놀이의 역사적 전개

한국은 경기(競技)·오락·연희·곡예 형식의 놀이가 많이 전승되어 오고 있으며, 놀이의 역사는 한국과 한국인의 역사만큼 오래 되었다. 전통놀이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상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상고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고려시대, 조선시대 3 부분으로 나누어 전통놀이의 역사적 전개를 보고자 한다.

(1) 고대 ~ 삼국시대
삼국시대 이전 상고시대는 혈연집단을 기초로 공동생활을 하는 원시공동체 시대였다. 따라서 신분적인 계층의 분화나 통치권에 따른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분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대에는 공동으로 일하고 종교를 가지며, 함께하는 공동체 사회로, 놀이의 경우에도 공동체의 구성원이 계층적 제한 없이 참여하여 즐기는 공동체적 놀이가 중심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놀이를 대동(大同) 놀이라 부른다. 이 시기의 놀이는 일의 순조로운 성취를 위한 예측의 차원에서 연행되었거나 일의 결과에 대한 감사였기 때문에, 따라서 일과 신앙이 놀이에 통합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원시공동체 시대에서 군장사회시대로 넘어가면서 놀이 양식 역시 조금씩 다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군장사회시대(chiefdom)는 혈연 공동체를 넘어 군장(君長, chief)이라고 하는 통치자의 다스림 아래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 형태이다. 이 시대부터 농경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농사력(農事曆)과 일정한 관계를 맺게 된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농사력을 근거로 일정한 양식의 세시풍속이 형성되고, 놀이도 이를 바탕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이 시기 놀이의 전체적인 성격은 원시공동체 시대와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앞 시기의 놀이가 주술적인 신앙행위와 함께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이루어진 데 비하여 군장사회시대에 이르러서는 세시풍속과 밀접한 관련 하에 이루어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이 시기 국가인 부여, 고구려, 예맥 등 어느 나라에서나 농사를 마치고 매년 한 두 차례 날을 잡아서 국가적인 축제를 벌이고 노래와 춤을 중심으로 한 각종 놀이를 즐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여는 영고(迎鼓), 고구려는 동맹(東盟), 예맥은 무천(舞天) 같은 국가적 축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부여와 고구려의 수도애서 개최되었던 대규모 제천행사를 '국중대회(國中大會)'라 부른다.

이와 같은 축제는 일종의 집단적 제천행사로 춤을 추고 신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서 신으로부터 기대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술과 음식을 먹으며 노래와 춤을 밤낮으로 계속해서 즐겼는데, 오늘날 지역공동체 단위로 진행되는 동신제(洞神祭)에서 보이는 마을 굿에서 춤을 추고 신을 부르는 제의형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와 백제에서도 국가적 축제와 더불어 전통놀이를 행했다. 문헌상으로 백제에서는 주사위 놀이(握槊)·공 던지기 놀이(弄丸)·춤과 음악(伎樂) 등 잡희(雜戲)를 행하였다고 하며, 신라에서는 탈놀이·검무(劍舞)·다섯 가지 재주부리기(五伎)·처용무·원효의 무애무(無㝵舞) 등 백희(百戲)를 행하였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1975년 경상북도 경주시 동궁과 월지(안압지)에서 출토된 14면체 주사위인 주령구를 통해 신라 귀족들의 놀이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주령구(酒令球)는 정사각형 면 6개와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 주사위로 진품은 유물처리 도중 불타버리고 현재는 복제본 만 남아 있다. 이 주령구의 각 면에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술자리에서 주사위를 굴려 벌칙을 받는 놀이를 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벌칙은 다음과 같다.

1. 금성작무(禁聲作舞): 술 마신 뒤 소리 내지 않고 춤추기
2. 중인타비(衆人打鼻): 여러 사람이 코 때리기
3. 음진대소(飮盡大笑): 술 한 잔 다 마시고 큰 소리로 웃기
4. 삼잔일거(三盞一去): 술 석 잔 한 번에 마시고 한 걸음 걷기
5. 유범공과(有犯空過): 여러 사람이 덤벼들어 장난쳐도 가만히 있기
6. 자창자음(自唱自飮): 혼자 노래 부르고 술 마시기
7. 곡비죽진(曲臂卽盡): 팔을 구부린 채 술 다 마시기
8. 농면공과(弄面孔過): 얼굴을 간지럽혀도 가만히 있기
9. 임의청가(任意請歌): 마음대로 사람을 지목해 노래 청하기
10. 월경일곡(月鏡一曲): 월경이라는 노래 부르기
11. 공영시과(空詠詩過): 시 한 수 읊기
12. 양잔즉방(兩盞卽放): 술 두 잔 즉각 마시기
13. 추물막방(醜物莫放): 더러워도 버리지 않기
14. 자칭괴래만(自唱愧來晩) - 스스로 괴래만(도깨비)이라 부르기

(2) 고려시대
국가적 축제로서의 놀이는 삼국시대를 걸쳐 고려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고려시대의 국교는 불교였는데, 이 불교의 영향으로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가 발전하였다. 팔관회는 삼국시대에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국가행사로 치루어진 종교행사로 궁중 등에서는 가무백희(歌舞百戱)가 행해졌다고 한다. 특히 팔관회 의식이 이뤄지는 곳은 사방에 향등을 달고 2개의 채붕(綵棚)을 세워 장엄하게 장식하였다. 연등회는 팔관회와 더불어 고려시대 국가적 행사로 자리잡힌 불교 법회이다. 연등회를 개최할 때에 대궐에 많은 등롱을 밝혀 장식하고, 술과 다과를 마련한 가운데 음악과 춤 및 연극을 베풀어 군신이 함께 즐겼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부처와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빌었다고 한다. 팔관회와 연등회는 고려시대 최고의 법적인 행사로서 역사적으로 거행되었으며 전승됨에 따라 이 들 행사에 부속된 가무백희도 함께 발달하였다고 불 수 있다.

팔관회를 비롯한 연등회는 신분적인 차별 없이 임금과 신하 등 모든 사람이 동참하여 즐기는 국가적 축제였으므로 그 성격상 공동체적 놀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놀이 형태는 기원 후 약 3세기경부터 고려 원종 집권시기인 약 13세기까지 대략 1천 년 간 지속되었다. 이 때에는 가무백희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적 놀이가 중심을 이루었으므로 신분적인 차별 없이 놀이마당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 말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팔관회와 연등회 등 국가적 축제는 그 규모가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성종(B.C.960~997)은 유교 이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음악과 춤 등의 백희(百戲)를 잡다하고 상스러운 것이라 하여 폐지하였다. 그러나 신라 이래로 고려에 이르기까지 연행되던 팔관회와 연등회 등의 국가적 행사에서는 가무백희가 여전히 채붕이라 불리는 장식 무대에서 공연되었으며 이와 같은 놀이형태는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14세기 후반부터 채붕에서 공연하는 각종 놀이를 산대잡극(山臺雜劇)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채붕이라는 무대의 설치로 인하여 놀이를 직접 담당하는 자와 관람하는 자가 구별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산대잡극 이후에는 왕과 귀족들이 팔관회에 참여하되 채붕 위의 산대놀이를 구경하는 것으로 놀이의 방식이 굳어지게 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 섣달 그믐날 가면을 쓴 사람들이 도구를 가지고 주문을 외면서 귀신을 쫒는 행사인 중국의 나례의식이 유행하면서 점차 전통적인 국중대회인 팔관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나례는 악귀를 쫓는 의식에서 점차 연극적 행사로 바뀌어 우인(偶人) 또는 창우(倡優)라고 하는 직업적 배우가 등장하여 관중을 즐겁게 하였다. 따라서 14세기 중엽에는 나례의식이 종교적 기능을 지닌 구나(驅儺) 부분과 각종 묘기 및 탈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가무백희의 나희(儺戲)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산대
(3) 조선시대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불교를 억압하고 유학을 받드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의하여 국가 행사이자 불교 행사인 팔관회와 연등회는 중단되고 만다. 그렇지만 산대잡극과 중국에서 들어온 나례는 계승되어 더욱 성행하였다. 광해군(재위 1608~1623) 때에는 나례도감 또는 산대도감이라고 하는 관청을 두어 산대잡극과 나례행사를 관장하였으며, 특히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맞이할 때 산대놀이를 공연하였다.

산대놀이가 팔관회와 연등회와 같은 국중대회와 관계 없이 구경거리로서 의미를 지니기 시작하여 지배층의 전유물이 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궁중에서는 필요한 시기에 높은 대를 설치하고 서울 사대문 밖에 살면서 궁중의 천한 일에 종사하던 전문 놀이꾼인 광대들을 동원하여 놀이를 시켰다. 그리고 왕과 신하들은 이를 구경하며 연희를 즐겼다.

국가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즐겼던 국중대회에서 광대들을 동원하는 구경 위주의 산대놀이로 놀이문화가 변화함에 따라, 당시의 놀이 구성원은 광대로 이루어진 전문 놀이꾼과 귀족 계급으로 이루어진 구경꾼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반 백성은 구경꾼으로조차 참여하기 어렵게 됨으로써 놀이마당에서도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게 되었다.

산대놀이는 조선시대 인조(재위 1623~1649) 이후에 중단되었으며, 그 이후 산대놀이 등의 놀이마당은 궁중에서 민간으로 이동하였다. 놀이의 양식도 개별적이고 소규모화 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신분에 따른 놀이의 계층화 현상이 점차 확대되어 귀족성을 뛰는 놀이는 하층민들이 할 수 없도록 통제하는 일도 있었다. 이 시기 지배층이 독점하던 놀이는 격구(擊毬)·투호(投壺)·쌍륙(雙六) 등이었다.

격구는 말 위에서 '장시'라는 긴 채를 이용해 공을 쳐서 상대의 구문(毬門)에 넣어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다. 특히 격구는 말과 넓은 구장이 있어야 하므로 일반 백성이 놀이의 조건을 갖추기 힘들었고 따라서 지배층의 전유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왕조 실록에도 조선시대 역대 왕이 격구를 했다는 기록이 두루 실려 있다.

투호는 병이나 항아리 따위에 붉은 화살과 푸른 화살을 던져 넣어 들어간 화살의 숫자로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다. 투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실록에서 기록을 찾을 수 있으며, 이를 보아 궁중 놀이의 종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선왕이 겨울에는 격구를 하고 여름에는 투호, 봄·가을에는 활쏘기를 하는데, 지금은 겨울철이니 바로 격구의 때이다. 내가 세자 및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격구를 하고자 한다."
『세종실록』 권44. 13년 11월 임신조(壬申條)

그러나 격구는 일부 귀족들의 지나친 사치로 인하여 효종(1649~1659) 대에 이르면 거의 사라지게 된다. 다만 말을 사용하지 않는 '장치기' 놀이가 세간에서 널리 전승되었다. 투호는 당시 양반 계층이 마음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전승되었다.
투호
이 밖에도 주사위를 던져 승부를 정하는 승경도(陞卿圖)놀이가 있다. 승경도 놀이는 옛 벼슬 이름을 종이에 도표로 그려 놓고 주사위나 윤목(輪木)을 던져 누가 가장 먼저 높은 관직에 오르는가를 겨루는 일종의 보드게임이다. 승경도는 '벼슬살이 하는 도표'라는 뜻으로 '종경도(宗卿圖)', '종정도(從政圖)'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승경도 놀이는 오각형으로 길쭉하게 만든 윤목이나 주사위를 굴려서 나온 수대로 말을 이동하여 놀이판의 최종 봉착지인 봉조하(奉朝賀)에 도착하면 승리한다.

승경도놀이는 주로 양반 자제들이 즐기던 전통놀이로 조선시대 관직의 체계적인 관념을 익히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관리는 중앙과 지방을 합하여 모두 3,800명을 넘지 않았지만 관직은 등급이 많고 칭호와 상호관계가 매우 복잡하였기 때문이다. 이 놀이는 대개 계절에 상관없이 즐겼으나 이 놀이를 통해 일년의 운세를 점치기도 했기 때문에 주로 정월에 즐겨 놀았다.

승경도놀이의 주 놀이도구인 말판은 대개 가로 80cm, 세로 120cm 내외의 크기이며 바둑판 형으로 격자를 만들고 그 안에 관직과 다음 이동할 칸의 위치를 써 넣어 만든다. 칸의 수는 적게는 80여 칸, 많게는 300여 칸을 넣기도 한다. 벼슬자리의 수와 써 넣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방에 이른바 외직인 8도의 감사·병사·수사·주요 고을의 수령을 배치하고, 중앙부의 첫 꼭대기에는 정1품을, 그다음에 종1품을 차례대로 늘어놓아 맨 밑에는 종9품이 오게 한다.

놀이방법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다. 먼저 출발점인 초도(初度)에서 출발점을 정한다. 출발점으로는 크게 문과(文科), 무과(武科), 세상에서 은거하는 학자로서 임금이 특별히 벼슬을 내린 사람인 은일(隱逸), 조선시대 공신과 현직 당상관의 자손에게 과거를 통하지 않고 벼슬을 준 남행(南行) 등이 있다.

이렇게 하여 각자의 출발점이 정해지면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수에 따라 이동하며 누가 빨리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문과 출신 중 가장 높은 자리는 영의정이며 무과 출신은 도원수이다.

그런데 말을 옮기는 도중에 중요한 관직에 오르면 그 관직이 지니는 특성에 따라 상대방을 파직하거나 사약을 내림으로써 놀이의 변화와 긴장감이 더해진다. 예를 들어 왕을 가까이 모시는 홍문관(弘文館)이 되면 자기보다 앞서 높은 관직에 오른 상대방을 파면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 때 파면당한 상대방에게 주사위를 굴릴 기회가 주어져 일정한 수가 나오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자신을 파면했던 홍문관을 반대로 파면시킬 수도 있다.

벌칙으로는 파면이나 유배, 사약 등이 부과되는데 파면이나 유배의 경우에는 복직이 가능하나 사약을 받는 경우에는 바로 놀이에서 탈락하게 된다.
종경도치는 모양과 승경도판
조선시대 놀이의 특징으로는 계층에 따른 놀이의 분리 뿐 만 아니라 제의와 놀이의 분리가 있다. 제의적 기능을 지닌 의례와 관련된 놀이는 유교적 사고로 인하여 놀이가 배제된 의식으로 바뀌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마을굿으로 행해지던 지역축제인 동신제(洞神祭)가 축문을 읽는 제사 형식으로 바뀐 것을 들 수 있다.

놀이의 계층화 현상이 분명해 지면서 전통놀의의 의미 역시 달라졌다. 상하 분별없이 국가적으로 함께하며 즐기던 국중대회 시대까지는 민간에서 즐기는 민속놀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놀이 공동체 시대와 국중대회 시대의 놀이는 계층의 구별이 없었으므로 민속이 곧 나라의 풍속이었기 때문이다.

산대놀이가 생기면서 놀이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계급이 분리되어 놀이를 하고 그것을 보는 관계가 서로 성립되었다. 따라서 민간의 풍속과 양반의 풍속, 관의 풍속이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각각의 전통놀이가 이원적으로 존재하면서 근대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때부터 민속놀이라 하면 피지배층의 전통놀이라는 별도의 의미를 지니게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전통놀이라고 하면 피지배층의 놀이뿐만 아니라 양반과 궁궐의 풍속까지 모두 아우르는 놀이를 의미한다.

Infokorea 2020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제작진과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정보를 제공합니다. 또한, 한국의 문화, 사회, 역사, 경제 관련 주제를 특집으로 제공합니다. 2020년 호의 주제는 '한국의 전통놀이'입니다.

발행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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