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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

한국의 궁궐 - 4

궁궐 밖에서 치른 유교 의례와 왕의 행렬

유교의 다섯 가지 의례와 궁궐

유교를 국가를 통치하는 근본 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유교에서 정해 놓은 의례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의례는 크게 신에게 드리는 제사, 경사스런 일을 축하하는 행사, 손님을 맞이하는 의식, 군인의 출정을 기리는 의식, 그리고 장례를 치르는 의례 다섯 가지로 구분되었다.

다섯 의례 가운데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신에게 올리는 제사였으며 이 제사의 주재자는 국왕이었다. 국왕이 주재자가 되어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는 큰 제사, 중간 제사, 작은 제사로 구분되었으며 큰 제사로는 사직단과 종묘에 올리는 제사가 있었다. 사직단은 땅과 곡식을 주관하는 신에게 올리는 제단이며 종묘는 역대 죽은 임금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었다. 이 두 제사는 국가의 가장 상징적인 제사였으며 종묘와 사직은 그 자체로 국가의 존재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일 정도였다. 중간 등급의 제사로, 농사를 주관하는 신을 모신 선농단과 중국의 학자인 공자를 신격화해서 공자에게 제사 지내는 문묘가 있고 그 밖에 산이나 바다에 깃든 신령에게 올리는 제사가 있었다. 작은 등급의 제사는 말을 키우는 일을 주관한 신의 제사나 큰 강이나 산의 신령께 올리는 제사 등이 있었다.

국왕은 유교 의례의 주재자였기 때문에 궁궐은 실은 유교 의례의 장소로써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궁궐의 내부만이 아니었다. 궁궐 밖, 도성 주변에 산재해 있는 각종 제단이나 사당, 왕릉 등은 국왕이 직접 제사를 지내는 장소였다. 따라서 국왕은 수시로 성대한 행렬을 꾸미고 궁궐을 나와 도성 안팎 제단에 직접 나가서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도성민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큰 구경거리였다. 그리고 이런 행사를 통해서 국왕은 백성들의 모습을 직접 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궁궐의 왼쪽은 사직단, 오른쪽은 종묘

한양을 처음 건설하면서 궁궐과 함께 지은 것이 사직단과 종묘였다. 사직단은 궁궐에서 앞을 볼 때 오른쪽에, 종묘는 왼쪽에 모셨다.이것은 멀리 기원전 7세기 이전 중국의 주나라 때부터 정해 놓은 규범이었다.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이 원칙을 따랐으며 고려나 조선왕조 역시 그 원칙을 준수했다. 다만, 도시의 형태와 궁궐의 구성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의 종묘와 사직단은 중국과는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경우, 늦어도 당나라 부터 송, 원, 명, 청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도성 내 궁궐 남쪽 담장 바깥에 서로 대칭되는 위치에 종묘(Imperial Ancestral Temple)와 사직단(Shejitan Altar)을 세웠다. 중국의 궁궐은 궁성이라는 안쪽 담장과 황성이라는 바깥 담장의 2중 담장을 두르고 있었는데 사직단과 종묘는 궁성의 바깥, 황성의 안쪽에 세웠다. 북경의 자금성의 경우, 황성 정문인 남문을 들어서면 북쪽으로 곧바로 난 길 오른쪽으로 종묘가 있고 왼쪽에 사직단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황성은 일반인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황제가 종묘나 사직단에 제사 지내는 모습은 외부에는 노출되지 않았다.

반면에 현존하는 서울의 종묘와 사직단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보면 종묘는 동쪽 약 1.2킬로미터 위치에 창덕궁 남쪽에 있고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쪽 인근 약 700미터 위치에 있다. 위치도 대칭이 아니지만 시설의 규모나 형태에서도 대칭적인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조선시대 한양의 궁궐에는 궁성만 있고 황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양의 종묘나 사직단은 민가가 운집해 있는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도성의 주민들은 국왕이 종묘나 사직단에 가는 행차를 지켜보곤 했다.

지금도 종묘와 사직단은 6백년 전 처음 지어졌을 때 그 자리에 본래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 또한 종묘의 제사는 왕실의 후손들에 의해 지금도 매년 5월이면 장중한 음악이 연주되고 느릿하면서 움직임이 큰 춤이 벌어지는 가운데 정성껏 치러지고 있다.

국왕이 직접 올린 종묘와 사직단의 제사, 부묘祔廟 후의 흥겨운 놀이

절기가 되면 국왕은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직접 종묘와 사직단에 나아가 제사에 임했다. 신을 불러 모시고 정성껏 절을 올리는 제사는 사방이 고요한 한 밤중에 드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국왕은 전날 밤에 제단 근처에 와서 옷과 모자를 갖추어 입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정해진 시각이 되면 절을 올리곤 했다.

왕이 화려한 가마를 타고 궁궐 문을 나서서 사직단이나 종묘로 이동하는 행렬은 이렇다 할 구경거리가 없는 도성 주민들에게 큰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런 볼거리 중에 도성민들을 흥분시키는 때는 새로 종묘에 왕의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는 날의 행렬이었다.

왕이 죽으면 3년 동안을 국왕을 비롯한 중앙 관료들이 몸가짐을 조심하고 잔치를 열지 못하고 노래를 떠들썩하게 부르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에 궁궐 안에는 죽은 왕의 위패가 모셔지고 매일 엄숙한 제사가 치러졌다. 드디어 무사히 3년이 지나면 위패를 종묘에 모시게 되고 이로서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나는 것이었다. 새로 즉위한 왕은 선왕의 위패를 모시고 궁궐을 나와 종묘에 가서 위패를 모시고 나서 홀가분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궁궐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 때 왕의 행렬은 3년 동안 참고 억제했던 노래와 춤을 곁들인 흥겨운 것이었다. 신하들은 새 왕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올리고 여인들은 노래와 춤을 선사하며 도로 곳곳에는 다섯 가지 색깔--황, 청, 백, 적, 흑(또는 녹)--로 치장한 울긋불긋한 채색 치장이 장식되었다. 돌아오는 길의 궁궐 문 앞에서는 나무로 거대한 산을 만들고 거기에 갖가지 치장물을 꾸미고, 주변에서는 광대들이 극과 놀이를 펼쳤다. 이 모든 것들은 도성 주민들에게 개방되어 주민들은 함께 웃고 떠들었다. 왁자지껄한 놀이가 별로 없었던 도성에서 이 날은 예외적인 때였다.

한밤 중 도성 밖에서 치른 선농단 제사와 국왕의 농사 시범

농사를 주관하는 신을 모신 선농단은 도성 바깥 동편의 넓은 곳에 논을 끼고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선농단에서는 왕이 직접 농사 짓는 시범을 보여야 했기 때문에 성 안에 제단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신령을 불러들이고 제사를 올리는 것은 하루가 시작되는 밤 12시 조금 지나서 치르는 것이 관례였다. 선농단은 도성 바깥에 있으므로 왕은 미리 한 밤중 가마를 타고 성문을 나서서 제사 시각 조금 전에 단 주변에 대기하고 있다가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아침이 밝기를 기다려 제단 근처에 있는 시범 논에 가서 쟁기를 잡고 소를 모는 행사를 직접 시연했다. 국왕의 시연이 끝나면 왕세자가 뒤따라 같은 시범을 보였고, 정부 고위 관료들이 차례로 뒤를 따라 했다. 또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도 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군인들은 울긋불긋한 깃발을 들고 행사장 주변을 경비했다. 행사를 마치고 나면 농민들이나 군인들에게는 노고를 위로하는 음식이 베풀어졌으며 궁궐 안에서는 고위 관료들이 왕이 내려준 음식과 술을 즐겼다. 선농단 제사는 20세기에 들어와서 폐지되었다. 제단 근처 농사 시범을 보이던 넓은 논밭이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주택들이 가득 들어섰지만 다행히 제단만은 남아있어서 옹색하지만 옛 정취의 일부를 남기고 있다.

왕자가 학교에 들어가는 의식을 치른 문묘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묘는 도성의 동북 쪽 창경궁 뒤에 있었다. 도성의 문묘는 학교를 겸하고 있어서 장차 고급 관리가 되기를 꿈꾸는 청년들은 성균관이라고 하는 이 학교에 나가 관리 등용에 대비한 공부를 했다. 국왕은 절기에 따라 직접 문묘에 와서 절을 올려 국왕 자신이 공자를 극진히 모시는 시범을 보였다.

문묘에서는 나이 어린 왕자가 학교에 들어가는 일을 축하하는 의식도 치렀다. 왕자의 입학 의식에는 장차 왕자의 스승이 될 이름난 학자가 참여하여 왕자와 학문에 대한 문답을 하는 절차를 치렀다. 유교의 경전을 익혀 이를 정치의 토대로 삼으려는 조선왕조에서 왕세자의 교육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왕세자 입학식은 그런 의미에서 왕실의 큰 행사 중 하나였다. 왕세자가 입학식을 마치고 궁궐로 돌아오면 국왕은 왕자가 학교에 들어간 일을 기념해서 관리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어주곤 했다. 특히 왕세자의 스승에게는 왕도 최대한의 예의를 보였다. 어린 왕자가 성장하여 장차 다음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 왕자의 스승은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맡기도 했다.

성균관은 문묘의 부속기관이었으며 가장 수준 높은 교육기관이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장차 나라의 큰 일꾼으로 쓰일 기회를 보장받았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이따금 국왕의 새로운 정책에 반대하여 집단행동을 벌였다. 학생들은 집단으로 수업을 보이콧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의사표시를 했고, 국왕은 이런 학생들을 강압적으로 억누르지 못하고 한 발 물러서거나 적당한 타협안을 마련하곤 했다.

도성 동쪽과 남쪽의 관우 사당

기원 3세기 중국 촉나라 장수인 관우는 의리와 충절로 이름났으며 그를 신격화한 사당이 중국에서는 5, 6세기부터 나타났다. 뒤에 관우는 재물을 관장하는 인물로도 알려지면서 민간에서 크게 인기를 얻어 그의 사당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관우 사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반도에 관우를 모신 사당이 지어진 것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의 군인들이 조선을 도우러 왔다. 이들은 전쟁에서 신의 도움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관우의 사당을 자신들의 머무는 곳에 짓곤 했다. 전쟁이 끝 난 후에도 관우의 사당은 그대로 남아서 이후 조선 왕실이 중요하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 되었다. 서울에는 도성 동쪽 밖과 남쪽 밖에 각각 한 군데씩 사당이 지어졌다.

일단 관우의 사당이 지어지자 역대 국왕들이 관우 사당에 직접 제사 지내는 일이 관례가 되었다. 관우 사당은 당시 조선의 일반적인 사당 건물과 다른 중국식 건물 형태였다. 또한 조선에서는 사당 안에 주인공의 이름을 적은 작은 나무토막만을 모시는 것이 관례였지만, 관우 사당에서만은 인물을 묘사한 조각상을 새겨서 모셨다. 관우 사당은 도성 동쪽 것을 동묘, 남쪽 것을 남묘라 불렀고 두 사당 정전 안에는 붉은 빛을 띤 관우의 조각상이 있고 그 곁에는 관우가 전쟁에 나가서 사용했다는 커다란 창도 있었다. 또 관우의 부하와 아들의 조각도 함께 모셨다. 18세기에 오면서 역대 임금들은 한층 관우 사당에 대한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종종 직접 사당에 나갔는데, 여기에는 국왕의 위엄을 신하들에게 내세우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관우는 왕에게 충성을 바친 장수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이런 관우를 높임으로써 조선의 관리들에게도 국왕에 대한 충절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었다.

도성 바깥에 산재한 왕릉과 국왕의 행렬

역대 임금의 무덤이 있는 왕릉 역시 유교적인 제사의 중요한 대상 중 하나였다. 특히 조선왕조는 5백년이 넘는 장수 왕조였기 때문에 무려 27대에 걸쳐 왕이 대를 이어갔고 그에 따라 무수한 왕릉이 만들어졌다. 또 정식 왕은 아니지만 사후에 왕으로 추대된 경우에도 왕릉을 만들었고, 후궁이지만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에도 후궁의 무덤을 왕릉에 준하는 규모로 꾸몄다. 왕세자로 있다가 죽었을 때도 왕릉 급의 무덤을 만들었다.

명이나 청대 중국의 황제릉은 큰 산 아래 무덤이 집중되는 방식을 취했는데, 조선에서는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다. 현존하는 무덤 만해도 왕과 왕비의 무덤 외에 대비, 후궁 중에 아들이 왕이 된 경우와 왕세자의 무덤을 포함하여 모두 42기의 무덤이 남아있다. 여러 왕릉 가운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무덤은 이후 왕릉들의 모범이 되었다.

새로 왕이 즉위하면 자신으로부터 가까운 선대 왕의 무덤에 직접 참배하는 것이 관례였다. 국왕이 궁궐을 나서서 왕릉으로 가는 행차 역시 성대한 행렬이었다. 왕릉은 도성의 동쪽과 서쪽 교외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도성 동쪽 약 13킬로미터에 위치한 동구릉은 태조의 무덤을 비롯한 아홉 개 능이 집결된 곳으로 유명했다. 왕이 능에 참배하러 갈 때는 성대한 행렬을 이루게 마련이었다. 18세기에 와서는 억울한 사연이 있는 백성들이 왕 앞에 나와서 직접 자신의 사연을 아뢰는 격쟁擊錚이 한층 확대되었는데, 이 때문에 왕릉에 참배가는 왕의 행렬이 멈추는 일이 잦았다. 관리들은 가급적 백성들의 격쟁을 막으려고 했지만 국왕들은 오히려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수원 사도세자 무덤의 화려한 행렬

왕릉 행차 중에 이름난 것으로 조선 제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의 부친 사도세자 무덤의 행차가 있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에 부친의 무덤을 당시 조선에서 최고 명당이라고 알려진 수원읍 뒷산으로 옮겼다.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는 왕세자 시절 부왕인 영조(재위: 1724-1776)의 미움을 사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으며 그 무덤이 초라했었다. 무덤이 새로 들어서면서 수원읍은 약간 북쪽으로 이전되었다. 정조가 머물던 창덕궁에서 수원까지는 약 30길로미터 거리였으며 새로 무덤이 조성되자 정조는 수많은 신하들과 왕실 가족을 데리고 새 무덤까지 다녀오는 행차를 했다. 또 1795년에는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자신의 생모인 혜경궁을 모시고 수원까지 가서 생모의 60세 생일잔치를 열었다. 이런 성대한 행사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모두 창덕궁이었다. 이 행사는 화려한 채색 그림으로 제작되어 병풍으로 꾸몄다.

Infokorea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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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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