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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

조선시대 왕의 하루일과와 궁중생활 - 2

왕의 낮일과

새벽에 침전에서 일어난 왕의 첫 번째 일정은 아침 조회였다. 조회란 말 그대로 조정에서의 모임인데, 조선시대의 조회는 상참, 조참(朝參), 조하(朝賀) 등으로 구분되었고 각각의 조회 의례가 있었다. 이렇게 조회 의례를 다양하게 한 목적에 대하여 정도전은 군신 간의 엄격한 질서 확립을 들었다. 실제로 상참을 비롯한 조참, 조하 등의 조회 의례는 군신 간의 엄격한 질서 확립을 목적으로 거행되었다. 궁궐에서 상참이 거행되는 공간은 편전 그리고 편전의 전정(殿庭)이었다. 상참 때, 편전에는 왕이 자리했고, 편전의 전정에는 신료들이 자리했다. 그러므로 새벽에 침전에서 기상한 왕은 상참을 거행하기 위해서는 편전으로 가야 했다. 이에 따라 궁궐에서 편전은 침전 앞에 자리하였다. 경복궁의 경우 침전인 강녕전 앞의 사정전이 편전이었다.

파루 후 침전의 침실에서 기상한 왕은 해가 뜰 무렵에 상참에 참여하기 위해 침실을 떠났다. 따라서 왕이 자연인에서 지존으로 변신하는 첫 번째 경계점은 침실의 문이었다. 침실 문을 나갈 때, 왕은 의관을 정제했으며 이때 입는 옷과 모자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색과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침실문 밖에는 상궁과 내시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왕을 수행하였는데, 상징물과 시종 역시 왕의 권위를 드높이는 것이었다.

왕이 상참에 참여할 때 입는 복장은 익선관에 곤룡포였다. 검은색의 익선관은 사모(紗帽)처럼 생긴 모자로서 윗부분에 두 개의 뿔 모양 장식을 부착하였다. 익선관의 뿔 모양은 매미의 날개를 상징한 것으로, 이슬을 먹고 사는 매미의 청렴과 검소를 본뜬 것이었다.

곤룡포는 붉은 색의 두루마기로서 양 어깨, 가슴 그리고 등 부분에 황금색 실로 수놓은 용무늬를 달았다. 곤룡포란 용무늬를 수놓은 옷이란 의미였다. 용무늬의 경우 왕은 발톱이 다섯 개인 오조룡(五爪龍)을, 왕세자는 발톱이 네 개인 사조룡(四爪龍)을 사용하였다.

익선관에 곤룡포 차림으로 침실의 문을 나온 왕이 지존으로 변신하는 두 번째 경계점은 침전의 정문 바깥 즉, 편전이었다. 편전으로 가기 위해 침전 정문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왕은 붉은 색과 푸른색의 가리개와 부채인 산(繖)과 선(扇)으로 가려졌다. 산은 비단이나 천으로 만든 가리개로 비나 해를 가리기 위해 사용했는데, 모양이 둥근 것은 대산(大繖), 네모난 것은 방산(方繖)이라고 하였다. 선은 꿩의 깃털을 짜서 만든 부채로 중국의 무왕이 만들었다고 한다. 해를 가리거나 먼지를 막을 때 또는 바람을 일으킬 때 사용했다. 부채의 무늬에 따라 용이면 용선(龍扇), 봉이면 봉선(鳳扇) 그리고 작이면 작선(雀扇) 등으로 구분되었다.

왕이 편전으로 행차하기에 앞서 편전 역시 왕권을 상징하는 온갖 장식품으로 장엄(莊嚴)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왕이 앉을 어좌(御座) 그리고 향을 피우는 향안(香案)이었다. 왕이 편전의 어좌에 오르면 편전의 전정에 정렬해 있던 관료들은 두 번의 절을 올렸다. 전정 주변에는 화려한 기치를 든 의장병들이 둘러섬으로써 왕의 위엄을 한껏 올렸다.

이들 외에 측근 신료들과 호위병들 역시 왕을 수행하였다. 수행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왕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력자로 더욱더 상징화되었는데, 예컨대 조참을 거행하기 위해 정전의 정문으로 이동하면 더욱더 많은 상징물과 수행원들이 수반되었다. 상참과 조참은 여러 면에서 대비되었다. 상참은 일부 관료들만이 참여하는 조회 의례였지만 조참은 백관이 참여하는 조회 의례였다. 거행 시기 역시 상참과 달리 매일이 아니라 매달 5일, 11일, 21일, 25일의 네 차례였다. 동원되는 의장물이나 상징물 역시 상참보다 더 많고 화려했다. 이처럼 조참은 규모가 크고 거행시기도 드물기에 편전이 아닌 정전의 정문에서 거행되었다. 이 같은 상참 의례와 조참 의례를 통해 왕은 자신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고 더 나아가 군신 간의 엄격한 질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왕은 아침 조회에 이어 침전으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였다. 침전은 중앙의 대청과 좌우의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왕이 식사하는 곳은 온돌방이었다. 온돌방에서 생활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과 반찬을 밥상에 차려서 방바닥에 앉아 숟가락과 젓가락을 이용해 먹었다. 밥상에 올라가는 밥은 개인마다 따로 나왔으며, 반찬의 경우 매우 가변적이어서 음식상의 품격은 반찬 수가 얼마냐에 따라 달라졌다.

왕의 밥상 즉 수라상 역시 음식 구성이나 식사 방법은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밥과 반찬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수라상에는 공상과 진상을 통해 올라온 당대 최고의 음식 재료로 궁중의 요리사들이 최고의 맛과 모양을 낸 음식이 최고의 식기류에 담겨 올라갔으며, 왕의 식사에만 따르는 특별한 절차가 있었던 점에서 일반인과 달랐다.

왕의 식사는 잔치 때의 대전어상(大殿御床)과 일상생활에서의 수라상으로 구별되었다. 대전어상은 각종 궁중 연회 때 왕이 받는 음식상이었다. 왕은 중국의 칙사를 맞이하거나 대비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또는 국혼을 할 때 궁중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는 수십 가지의 산해진미를 즐비하게 차린 음식상이 마련되었다.

반면 왕의 일상적인 식사는 아침(조수라), 점심(주수라), 저녁(석수라)의 세끼 수라 이외에 참참이 드는 간식으로 구분되었다. 그 외 아침 수라 이전에 가볍게 되는 쌀죽인 죽수라(粥水刺)가 있었다. 수라상의 반찬은 왕의 식성이나 기호에 따라 그 종류와 양이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수라상을 차리는 기본 법식의 테두리 안에서 가능했다.

수라상에 올라가는 밥은 쌀과 물만 이용해 만드는 백반과 팥물을 이용해 만드는 홍반 두 가지였다. 왕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백반과 홍반 중에서 골라 들 수 있었다. 수라상의 밥은 명산지에서 생산된 좋은 쌀을 재료로 하여 숯불을 이용해 곱돌로 된 솥에다 지었다. 수라상의 기본 밑반찬은 탕, 조치(찌개), 침채(김치), 장, 찜 또는 선, 전골 등이었다.

왕이 식사하기에 앞서 기미상궁이 음식을 맛보아 독이 들었는지를 검사했다. 이어서 왕은 은수저와 은젓가락을 이용해 식사하는데, 먼저 동치미 국물을 한 수저 떠먹었다. 그리고 밥을 한 술 입에 넣고 국을 떠서 같이 먹었으며, 이후 밥과 반찬을 들었다. 국에 밥을 말아 다 먹은 후 국그릇과 사용한 수저 한 벌을 내려놓고 다른 한 벌의 수저로 밥과 반찬을 계속 먹었으며, 마지막으로 숭늉 대접을 국그릇 자리에 올려놓고 밥을 한 술 말아서 먹는 것으로 식사를 마무리하였다.

이처럼 왕의 수라상을 한 번 차리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고생을 했다. 수라상에 올라가는 밥과 반찬에는 농어민들의 피와 땀이 어려 있었으며, 궁중 요리사들의 수고 또한 적지 않았다. 왕이 최고의 수라상을 받는 이유는 백성들이 편안히 잘 살 수 있게 좋은 정치를 하라는 의미였다. 때문에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면 왕은 수라상에서 반찬의 수를 줄이고 허름한 곳으로 거처를 옮겨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한다는 뜻을 보였다.

아침 식사에 뒤이어 왕은 다시 편전으로 가서 '시사(視事)'를 하였는데, '시사(視事)'란 '일을 본다.'는 뜻 그대로 국왕이 처리해야 할 공무를 집행하는 절차였다. 이때 왕의 복장은 익선관에 곤룡포였다. 왕을 면담할 때, 조정 중신들은 모두 꿇어 엎드린 자세로 말을 하였다. 만약 왕의 얼굴을 보고 싶다면 허락을 받아야 했다. 왕과 조정 중신들의 면담은 중신들이 왕에게 네 번의 절을 올리면서 시작되는데, 왕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좌우로 나누어 엎드리기 때문에 마차 맞절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절이 끝나면 으레 문안인사를 하고 이어서 국정 현안을 보고했다.

국정 현안 보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정원의 승지들이 하는 보고였다. 승지는 왕의 비서로서, 중앙과 지방에서 올라오는 모든 공문서와 상소문, 탄원서 등을 접수해 미리 검토하였고, 보고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상소문이나 탄원서는 되돌리기도 하였다. 승지들은 꼭 필요한 국정 현안을 골라 왕에게 보고했는데, 내용이 긴 공문서는 왕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도록 간단하게 정리하였고, 일상적인 사안에 대하여는 처리 방침까지 보고서 말미에 첨부하였다. 왕은 보통의 국정 현안은 승지가 제시한 대로 따랐으며, 왕의 결재 문구는 "그대로 하라"는 의미의 윤(允), 의윤(依允), 지도(知道) 등의 한 두 글자에 불과했다.

또한 승지는 왕이 중앙 부처나 지방 행정 조직에 잘못된 명령을 내렸을 때, 다시 검토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는 왕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가 승정원을 경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왕이 내리는 모든 명령 역시 승정원을 통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승지의 역할이 이처럼 막중하기에 문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인재들만이 승지에 임명될 수 있었다.

왕은 수많은 공문서에 일일이 붓으로 결재하기 힘들어 보통 계자인(啓字印)이라는 검은색의 도장을 찍었다. 계(啓)란 보고한 내용을 잘 알았다는 뜻이다. 왕은 공문서를 검토한 즉시 계자인을 찍었고, 공문서가 아주 많을 때는 측근 환관을 시켜 대신 찍게 하였다. 계자인이 찍힌 공문서는 왕의 결재가 난 것이므로 해당 부서에 내려 보내 시행토록 하였다.

계자인 이외에도 왕은 국정 업무에 따라 여러 가지 도장을 사용했다. 예컨대 양반관료의 임명장인 교지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도장을 사용했고, 과거시험을 보는 시험지에는 '과거지보(科擧之寶)'라는 도장을 사용했으며, 왕이 저술한 책이나 시 등의 작품에는 '규장지보(奎章之寶)'라는 도장을 사용했다. 또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는 '대보(大寶)'라는 도장을 이용했고, 일본에 보내는 외교문서에는 '이덕보(以德寶)'라는 도장을 이용했다.

문서 결재 이외에 양반 관료들을 만나 국정을 논의하는 일도 중요하였다. 의정부 대신들을 비롯하여 육조의 당상관, 삼사 관료 그리고 중대 현안에 당면한 부서에서는 수시로 왕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왕은 이들을 면담하여 국정 현안과 여론의 향배를 듣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또 긴급한 사항을 협의하기 위해 왕이 대신들을 면담하는 일도 많았다. 이처럼 왕은 매일 편전에 나가 승지의 보고를 받고 도장을 찍어 공문서를 결재하거나 또는 조정 중신들을 만나 국정 현안을 논의, 결정함으로써 만기를 처리하였다.

시사(視事)에 뒤이어 '윤대(輪對)'를 하였는데, '윤대(輪對)'는 '돌아가며 대면한다.'는 의미로서, 각각의 행정 부서에서 순번에 따라 1명씩 궁중으로 파견한 관리를 왕이 만나보는 절차였다. 이들은 왕의 '시사(視事)'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왕을 알현하고 자신들의 부서와 관련된 업무를 보고했다. 윤대관은 하루에 5명 이하로 제한했는데, 문신은 6품 이상의 관료가, 무신은 4품 이상의 관료가 윤대관으로 선발되었다. 왕은 윤대관들을 면담하여 국정현안과 여론의 향배를 듣고 최종 결단을 내렸다. 또 긴급한 현안을 협의하기 위해 정승, 판서, 삼사 관료(三司官僚) 등을 인견(引見)하는 경우도 많았다.

왕을 면담하는 신료들은 모두 꿇어 엎드린 자세로 면담을 하였다. 만약 왕의 얼굴을 보고 싶으면 허락을 받아야 했다.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얼굴을 들고 왕을 보다가는 불경죄로 몰려 중벌을 받았다. 면담은 신료들이 왕에게 네 번의 절을 올리는 절차로 시작되었다. 이때 신료들은 왕의 정면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좌우로 나뉘어 엎드리기 때문에 마치 신료들끼리 맞절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절이 끝나면 신료들은 의례 왕에게 문안인사를 올린 뒤에 현안을 이야기했다. 국왕이 윤대를 끝내면 보통 한낮이었다. 그래서 윤대 이후에는 점심 식사를 하였다. 점심 이후에는 곧바로 경연(經筵)을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경연은 유학 경전이나 중국 또는 우리나라의 역사책을 교재로 이용한 공부였다. 경연(經筵)이란 '경전(經典)을 공부하는 자리'란 의미이다. 경전은 '성현의 가르침'이란 뜻이므로 경연은 결국 성현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자리라는 의미가 된다. 경연에는 아침의 조강(朝講), 낮의 주강(晝講), 저녁의 석강(夕講) 그리고 밤의 야대(夜對) 등 네 가지가 있었다. 조강, 주강, 석강은 일정한 시간에 행해졌기에 법강(法講)이라고도 하였다. 경연은 상참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편전에서 행해졌다. 이념적으로 국왕은 하루 네 차례의 경연에 모두 참여할 것이 권장되었지만 바쁜 국왕이 그렇게 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보통 하루에 한번만 하거나 아니면 며칠에 한 번씩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왕은 몇 년마다 겨우 한 번씩 마지못해 경연을 열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국왕의 업무능력 또는 성실성은 얼마나 자주 경연에 참여하느냐로 평가되곤 했다.

경연은 기본적으로 유교 경전이나 중국 또는 우리나라의 역사책을 교재로 이용한 강독과 토론이었다. 진행 방식은 일반적인 서당의 공부 방식과 유사했다. 경연에 참여하는 신하들은 비록 교육자의 자격이지만 신하이기에 엎드린 자세였다.

경연이 시작되면 왕은 이전에 공부한 내용을 복습하여 읽은 후 새로운 진도를 나갔으며, 학습량은 경전 본문의 서너 줄 정도였다. 새로 배울 내용을 경연관이 먼저 읽으면 왕이 따라서 읽었고 이어서 경연관이 글자의 음과 뜻을 설명하고, 경연에 참여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교재 내용에 대한 각자 의견을 개진하였다.

예정된 경연의 진도가 끝나면 왕이나 경연관들은 국정 현안을 제기하곤 하였다. 그러면 왕과 경연관들은 각자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이 과정에서 문제점이 부각되면 토론을 거쳐 해결 방안이 제시되곤 하였다. 이런 토론을 통해 왕은 유학에 대한 식견을 높이고 정치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이처럼 경연은 명색이 학문 토론장이었지만 실제는 정치 토론장과 같았다.

낮의 주강(晝講) 이후에도 왕의 일정은 많이 남아 있었다. 왕은 지방관으로 발령받고 떠나는 신료나 중앙으로 승진해 오는 관료들을 접견해야 했다. 특히 팔도의 관찰사나 중요지역의 수령들은 왕이 직접 만나 업무를 당부하고 그 지역의 현안문제도 논의해야 했다. 이렇게 몇 명의 신료들을 만나고 나면 저녁때가 가까웠다.

조선시대 국왕들이 오후 3세시쯤에 반드시 챙겨야 할 업무가 하나 있었다. 바로 야간에 궁궐의 호위를 맡은 군사들 및 장교들과 숙직관료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야간의 암호를 정해주는 업무였다. 이는 왕 자신의 안전 및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이것으로 왕의 하루일정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왕은 해지기 전에 다시 저녁 공부인 석강에 참여해야 했다. 석강 이후에는 저녁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야간업무를 보았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대비나 왕대비 등 왕실어른들에게 문안인사를 올려야 했다.

Infokorea 2016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제작진과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정보를 제공합니다. 또한, 한국의 문화, 사회, 역사, 경제 관련 주제를 특집으로 제공합니다. 2016년 호의 주제는 '한국의 궁궐'입니다.

발행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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