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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한국의 메르스(MERS) 기억하기: 전염병 경험의 활용

John P. DiMoia
John P. DiMoia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 총선이 2020년 4월 중순(15일)으로 예정된 가운데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바이러스(COVID-19) 대응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4월 중순 기준, 감염자 수만 봐도 한국은 세계적인 모범 사례 국이다. 특히 강력한 검사 및 추적 프로그램을 통해 감염 사례를 줄여나가는 한국 정부의 "확산 완화" 능력은 국제적인 찬사를 받고 있다. 정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공공 의료 종사자들의 집단 방역 능력에 공을 돌리면서 대중의 지지도 얻고 총선에서의 성공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과거 어떤 경험을 통해 이런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일부에서는 사스(SARS) 사태가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사실일까?

2003년 사스(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발병 이후, 동남아 전역의 정부는 사스에서 얻은 교훈을 모두 결집시켰다. 2009년 신종 플루(H1N1) 사태(싱가포르), 2015년 메르스(MERS, 중동 호흡기 증후군) 사태(한국) 때도 사스에서 얻은 지식이 동원되었다. 사스와의 유사성, 비교 용이성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조치이다. 다만 여기서는 현 코로나 사태를 이해하는 측면에서 더욱 적합해 보이는 한국의 과거 경험에 대해 논의하려고 한다. 분명 사스는 중요한 선례지만 이번 코로나 사태에는 상당한 이데올로기적 함의가 담겨있다. 특히 정확한 사례 보고, 투명한 대응, 국제기관과의 지속적인 소통에서 모두 실패한 중국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실 공중보건 시스템 담당자를 포함해 여러 사람에게 충격을 주고 한국의 경험을 재편하는 데 도움을 준 교훈은 사스보다는 메르스였다.

공중보건: 계속되는 혼란 속에서 출범

메르스를 다루기에 앞서 동북아 공중보건 형성 맥락으로 1940년대 후반 발생한 전염병의 확산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구체적인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주 이후가 된다. 여러 전선에서 전투를 치러야 했던 일본은 이후 수년에 걸친 전쟁 하는 동안 한반도의 기반 시설을 신경 쓰지 않았다. 1945년 이후 한국전쟁(1950~53)을 몇 년 앞둔 상황에서 중국, 일본, 한국 간의 난민 이주로 콜레라와 발진티푸스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중국에서 내전(1945~49)이 재개되고 일본(1945~52)과 남한(1945~1948)에서 공동 점령이 진행되면서 미 군사 당국의 우려가 고조되었다. 한국전 당시 출혈열 형태로 발병하는 한타바이러스 때문에 전투병들은 적, 아군 구별 없이 신장 질환을 겪었다. 일부 역사학자는 이를 중국과 북한이 자행한 생물학전과 연결해 추측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인 의사 이호왕 박사(Ho Wang Lee)가 바이러스를 치료하고 전쟁과 함께 시작된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다.

당시 급속하게 퍼진 전염병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한국인에게 남아 있다면 한국의 보건 체계는 현재의 행정 기관들과 연결 지어 볼 수 있다. 이들 기관 상당수는 일제 강점기 말기(1910~45) 및 한국 군정(1961~1987년) 이후 출범한 조직이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국민건강보험이 점진적으로 도입되었고(1963년, 1977년) 민주화(1989년)와 맞물려 대대적인 개혁이 이뤄졌다. 거의 비슷한 시기(1954~1960년)에 한국의 여러 병원은 한국전 여파로 국제 원조를 받았으며 유럽(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과 미국(미네소타 대학)으로부터 새로운 재원과 의료 교육을 받아 임상 실무에 대한 접근법이 바뀌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이 어떠한 위기에도 대처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생물 의학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곳의 실무와 제도적 규범은 20세기 중반 매우 다른 환경에서 획득한 것이다. 이것은 난민, 시신을 비롯해 전시 상황 및 즉각적인 영향과 관련된 비상사태로 가득한 응급상황에 대한 의료였다.

한국의 1950년대 후반은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했지만 야심에 찬 국민 건강 캠페인을 추진했다. 우선 한센병, 결핵, 말라리아 같은 만성질환 치료를 대상으로 했으며 WHO(세계보건기구)와 협력하기도 했다. 국민 건강 캠페인에 이어 추가로 가족계획(1964~80년대 중반), 기생충 퇴치 캠페인(1968~1990년대 초) 같은 강력한 사회 공학적 계획이 뒤따랐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인구 위원회(Population Council), JICA(Japan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와 같은 국제 파트너 및 국제기관과 신중하게 공조해 나갔다. 기생충 퇴치를 목표로 했던 두 번째 캠페인의 경우 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2년에 한 번씩 대변 샘플을 제출하도록 요청했으며 교사는 분석 전에 데이터를 수집해야 했다. 이러한 정부의 목표는 국민들에게 상당히 생소했으며 난처한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거나 자신의 반려동물 샘플을 제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부는 포스터, 인쇄 광고, 공공 홍보를 포함한 결연한 노력을 통해 정부의 보건 의도를 분명히 전달하려 했다. 전쟁 이후부터 80년대 초반에 자라난 세대는 학교, 사무실 또는 관련 공공 기관에서 일어나는 잦은 보건 관리(검사, 예방 접종, 샘플)에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림1, 2, 3

메르스 실패(2015년 5~6월)

국가 캠페인을 통해 얻은 성공적인 유산과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발전 양상을 고려하면 메르스 대응은 조용히 시작되었다. 보건 당국은 메르스가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2012년 등장한 메르스는 "외국" 문제로 치부되었지만 불과 3년 만에 한국에 나타났다. 인천 공항, 기차역, 버스 정류장에 부착된 메르스 주의 포스터에는 이 바이러스는 외부 세계의 것이고 한국인은 중동 지역에 가야만 노출된다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주로 낙타와 야자수(그림1)를 그려 놓았다. 한 유명 포스터는 메르스와 관계없는 쌍봉낙타(그림2)로 메르스를 묘사하였다. 여유로운 태도와 필요에 따라 허용되는 이동의 자유가 불시에 보건 시스템의 발목을 잡으면서 심각한 보건 사태로 이어졌고 박근혜 정부의 정치적 문제로까지 번졌다. 일련의 사태는 중동 외 지역에서 발생한 최대 규모의 메르스 전염으로 확대되었다.

메르스 확산 과정에 등장한 다양한 사례를 보면 초기 전염 양상과 강력한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불확실한 증상이 있었던 최초 환자는 검사를 받기 위해 9일 동안 4개 병원을 방문했다. 이 과정에서 최초 환자 및 동행한 일부는 격리 지침을 어기고 주변 사람과 병원 시설 주변을 감염시켰다. 그 결과 발병이 대중에게 알려졌고 서울에 있는 주요 보건 시설을 찾는 사람이 증가하면서 병동은 붐비고 환자를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 되었다. 한국 보건 시스템의 구조적 불평등(농촌/도시 격차, 지리적 고립, 수익성이 좋은 사적 측면을 선호하는 시스템에서 공공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은 분명 새로운 이슈는 아니었지만, 병원이 메르스 방역에 실패하면서 상황은 악화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확진자 187명 중 38명이 사망했으며 이 수치는 중동 외 지역에서 발생한 사망자 중 최대이고 경종을 울리는 주요 사건이 되었다.

한국은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면서 신속한 검사, 드라이브인 검역소, 연락처 추적, 마스크 배포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이러한 발전은 문화,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며 좁은 정치적 이해의 덕택도 아니다. 발열과 관련 증상을 감시하는 조치가 합리적이라면 모든 한국인에게 확실한 동의를 받았느냐는 가정에는 신중해야 하며 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내 비판 상당수는 국제적 여론을 형성하지 못했음을 인식해야 한다. 실제로 신천지 교회와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연관성은 논쟁이 되고 있고 일부 노인들은 치료와 교회 예배 중단에 불만을 토로한다.(그림3)

궁극적으로 한국에서 메르스 발병은 제도적, 구조적 불평등의 오랜 유산과 연결되며 한국 보건 시스템 내부에 존재하는 이러한 문제에 절실했던 관심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의료는 오래 역사를 가진 행정 체계이며 식민주의와 두 번의 전쟁에 이은 전환기에서 출발했다(한국은 베트남전(1964-1973년)에 광범위하게 참여했고 국가 최초로 의료 지원단을 파견했다). 뿌리 깊은 관행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정기적인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메르스는 이러한 필요성을 환기시킨 중요한 요인이었으며 2020년 개선된 관행은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검사를 활용하는 과정에 시작되었다.

[ 2020년 소키에타스 코리아나 강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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