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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

한국의 궁궐 - 3

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궁궐들

한양을 둘러싼 산은 북쪽에 주산인 북악산이 있고 서쪽은 인왕산, 동쪽은 낙산이고 남쪽에 목멱산이 자리 잡았다. 네 산 중에 높이로 치면 북악산이 해발 342m로 가장 높았지만, 산의 형상으로 보면 인왕산이 바위가 우뚝하게 솟은 우람한 형상을 하여 북악산보다 더 뛰어났다. 서쪽의 인왕산이 자태가 우람했던데 비하여 동쪽의 낙산은 높이도 낮고 산세도 보잘것없었다. 반면 남쪽의 목멱산은 산의 형태가 반듯하고 도성의 정남 방향에 놓여서 도성 사람들이 좋아하는 산이었다. 목멱산은 남쪽에 있는 산이라고 해서 남산이라고도 불렸다.

한양을 둘러싼 네 산 외에도 한양의 정북 방향에 위치한 응봉은 남쪽의 목멱산과 북쪽과 남쪽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는 모습인데, 이런 위치 때문에 풍수가들 사이에서는 응봉이야말로 도성의 주산의 자격이 있고 궁궐은 응봉 아래 지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조선의 다섯 궁궐 가운데 마지막에 지은 경운궁을 제외한 네 궁궐은 모두 산에 의지해서 자리 잡았다. 경복궁은 도성의 주산인 북악산을 배경에 두었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도성 정북방에 있는 응봉을 두었고 경희궁은 인왕산을 배경으로 했다. 조선 궁궐이 산을 배경으로 삼은 것도 풍수지리 사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산을 등져서 바람을 막고 또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생활에 이용하려는 자세는 풍수사상의 핵심이었으며 이런 생각이 궁궐에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새로운 가치관에 의한 경운궁의 위치

한 가지 예외적인 경우는 20세기 초에 세워진 경운궁이다. 경운궁은 도성 한양의 거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궁궐의 배경이 될 만한 산은 찾아볼 수 없다. 경운궁이 이전의 궁궐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산을 배경에 두는 방식을 취하지 않은 이유는 이 궁궐이 지어지던 20세기 초의 역사적 상황에 있다. 고종은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일본의 노골적인 압력을 물리치려는 의도에서 한동안 러시아영사관에 몸을 옮겼다가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국가의 온전한 자주성을 표방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짓는 궁궐은 산에 의지하는 전통적인 방식보다는 현실적으로 정치적인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또 원활한 도로 소통을 염두에 둔 위치가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운궁은 도성 한가운데 도로가 여러 곳으로 열린 지점이었으며 이런 정치적·지리적 위치상의 이점이 전통적 풍수사상을 밀어냈다고 볼 수 있다.

간선도로와 성문

처음 한양이라는 도시를 건설할 때 도시 건설을 담당한 사람들은 몇 개의 간선도로를 구상했다. 도성을 동서로 관통하는 하나의 간선도로가 나고 다시 성 안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뻗은 또 하나의 간선도로가 계획되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 조건 아래서 일직선 상의 도로가 서로 교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양의 간선도로들은 직선이 교차되는 모습이 아니고 구부러지고 휘어진 모습이었다. 간선도로 외에는 거의 물길을 따라 형성된 자연 발생적인 도로들이었다.

처음 한양이라는 도시를 건설할 때 도시 건설을 담당한 사람들은 몇 개의 간선도로를 구상했다. 도성을 동서로 관통하는 하나의 간선도로가 나고 다시 성 안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뻗은 또 하나의 간선도로가 계획되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 조건 아래서 일직선 상의 도로가 서로 교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양의 간선도로들은 직선이 교차되는 모습이 아니고 구부러지고 휘어진 모습이었다. 간선도로 외에는 거의 물길을 따라 형성된 자연발생적인 도로들이었다.

동서 간선도로와 궁궐

도로 중에 으뜸은 동서 방향으로 난 길이었다. 도로 중앙 지점에 큰 종을 매단 누각이 있어서 이 종으로 주민들에게 시각을 알리도록 했다. 누각은 종루라 불렀다. 동서 간선도로는 '운종가'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이는 도로라는 의미이다. 후대에는 '종로' 즉 종이 있는 길거리라는 이름도 생겼다. 종루 주변 간선도로에는 도시민의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늘어섰다. 한양의 주민들은 운종가에 나와 필요한 음식물이나 옷가지 등을 사고 때로는 가로변을 천천히 거닐기도 했다고 짐작된다.

한양의 네 궁궐은 모두 동서 간선도로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경복궁은 종루 동서 간선도로에서 북쪽으로 뻗은 또 하나의 대로 끝에 자리 잡았다. 이 대로는 6조대로라 불렀으며 도로 좌우에 중앙 최고급 관청들이 늘어서 있었다. 창덕궁은 종루 동쪽 약 2㎞ 지점의 동서 간선도로에서 북쪽으로 난 도로 끝에 위치했다. 이 도로는 창덕궁의 정문 이름을 따서 돈화문로라고 했다. 창경궁의 정문 앞에도 남북으로 좁은 도로가 나고 이 도로 남쪽 끝은 역시 동서 간선도로와 연결되었다. 경희궁의 정문은 동서간선도로의 서쪽에 직접 닿아 있었다. 이처럼 한양의 네 궁궐이 모두 동서 간선도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한양의 중심가로는 궁궐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장랑으로 이어진 6조대로의 위엄

태종은 한양의 중심 가로를 크게 정비하고 가로에 나란히 좌우에 장랑(長廊)이라고 하는 높고 긴 건물을 짓도록 했다. 장랑은 도로를 정비하기 위한 목적도 있고 도시 중심부 상점가를 형성하는 데에도 쓰였다. 아울러 장랑은 도로 바깥쪽에 사는 서민들의 모습을 외국 사신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다.

장랑은 종루에서 시작해서 동쪽으로는 창덕궁 돈화문 앞까지 서쪽은 경복궁 광화문 앞까지 연결되었으며 종루에서 남쪽으로 뻗은 장랑은 도성 남문까지 이어졌다. 장랑을 건설함으로써 한양의 중심가로는 일정한 높이에 동일한 형태를 갖춘 긴 건물이 가로변을 질서정연하게 꾸미게 되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는 6조대로라고 부르는 넓은 도로가 남쪽으로 뻗었다. 도로 좌우에는 6조라고 하는 6곳의 중앙 관청이 좌우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었고 그 밖에 한양의 행정을 총괄하는 한성부나 왕의 정책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사간원도 있었다. 건국 초에는 광화문 앞 좌우에 의정부와 삼군부가 대칭으로 자리 잡아서 의정부는 모든 나라 살림을 주관하고 삼군부는 군사 업무를 총괄하였지만 제3대 왕 태종 때 실제 국정을 6곳의 관청이 나누어 맡도록 하고 삼군부는 폐지하고 의정부는 명목상의 관청으로 두었다.

6조대로는 대략 길이가 500m 정도 되고 도로 폭은 50m를 조금 넘었다. 이런대로 좌우에 장랑이라는 긴 건물이 좌우로 나란히 이어지고 장랑 뒤에는 나라 최고 관청이 좌우에 늘어선 모습이었다. 장랑 곳곳에는 약간 높이가 높은 출입문들이 있어서 이 문으로 해서 각 관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6조대로는 한양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나라의 모든 명령이 이곳에서 작성되어 왕의 이름으로 전국에 공포되었다. 6조대로의 끝에 있는 광화문은 왕이 머무는 경복궁의 출입문으로써 그 상징성을 더했다. 왕이 궁 밖을 나갈 때는 화려한 행렬이 이 문을 통해 나가고 들어갔으며, 중국에서 황제의 서신을 지닌 사신이 오면 6조대로를 거쳐 이 문을 지나갔다.

6조대로는 경복궁이 그 전성기를 맞았던 15, 16세기에 가장 빛나는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에 타고 250여 년 동안 복구되지 못한 사이에 6조대로는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도 드물어지고 좌우의 위엄 가득했던 관청들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침체되었다. 6조대로가 침체의 시기를 맞고 있는 동안에 그 대리 역할을 한 곳은 창덕궁 정문 돈화문 앞의 돈화문로였다.
도성도

비좁은 돈화문로의 행렬

창덕궁 정문 앞에서 동서 간선대로인 운종가 사이 약 7백 미터에 이르는 돈화문로는 도로 폭이 넓지 않았다. 처음에 창덕궁은 왕이 임시로 머무는 이궁으로 계획되었기 때문에 이 궁궐로 들어가는 도로를 6조대로처럼 넓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을 복구하지 않은 채 창덕궁을 왕이 거처하는 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전에 6조대로에서 거행하던 각종 행사를 돈화문로에서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돈화문로는 도로 폭도 좁은 데다 주변에 고급 관청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옹색할 수밖에 없었다.

도로 폭이 좁아서 행렬을 장엄하게 꾸미는 데 한계가 있었고 가로변의 치장도 상대적으로 간소하게 되었다. 이런 비좁은 도로 여건이었지만 왕의 행렬을 소홀하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행렬이 지나갈 때는 도로를 꽉 메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1868년 경복궁이 다시 복구되기 전까지 왕실의 행렬은 대부분 돈화문로를 통해서 지나갔으며 도로 주변의 백성들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왕실 가족들의 행렬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간혹 왕의 행차가 있을 때 백성들이 행렬을 가로막고 징이나 꽹과리를 치며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왕에게 직접 아뢰는 격쟁도 벌어졌다. 본래 억울한 일을 겪은 백성에게는 궁궐 문 근처에 북이나 징을 두고 이를 쳐서 자신의 사연을 알리도록 한 제도가 있었다. 여기서 유래되어 왕의 행렬을 가로막고 억울함을 왕에게 직접 아뢰는 격쟁도 벌어졌는데, 특히 돈화문로가 주 무대였다.

왕의 시신을 모신 가마가 지나가던 창경궁 앞길

창경궁은 처음 궁을 지을 때는 대비의 처소를 마련할 목적으로 지었지만 건립된 후에는 여러 가지 다른 목적으로 쓰였다. 특히 창덕궁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접해 있었기 때문에 창덕궁에서 다 충족하지 못하는 기능을 이곳에서 치렀다. 대비 외에 여러 후궁이 주로 이곳에 머물렀으며 왕세자가 머무는 동궁도 처음에는 창경궁 안에 마련했다. 더 자주 활용된 것은 왕실 가족이 죽었을 때 시신을 모셔 두거나 시신을 무덤에 묻고 나서 약 25개월 정도 치르는 혼령에 대한 제사였다.

왕실에서는 왕이나 왕비 또는 대비와 왕세자가 죽으면, 5개월 동안 시신을 궁 안에 모셔 두고 절을 올리며 슬픔을 나누었다. 이때 시신을 모신 건물을 빈전이라고 했는데, 빈전은 편전 건물을 한시적으로 이용했다. 5개월이 지나면 시신을 궁 밖으로 내가 왕릉에 묻었고 신주를 궁궐로 가지고 와서 25개월 동안 신주에 제사를 지냈다. 이때 신주를 모신 건물을 혼전이라고 했다. 혼전 역시 창경궁의 편전이나 다른 빈 건물을 이용했다.

17세기 이후에 왕실 가족의 시신을 궁 밖으로 모시고 나갈 때 주로 지나는 문은 창경궁의 정문이었다. 시신을 모신 화려한 치장을 한 가마가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을 나서면 문 앞길을 따라 동서 간선도로로 이동해서 도성 동쪽 문인 흥인문을 나서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선 시대에 왕릉의 위치는 도성 주변에 널리 산재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왕릉이 가장 밀집한 곳은 도성 교외 동쪽이었다. 따라서 시신을 모신 행렬도 자연스럽게 동쪽 대문을 나섰다. 시신을 무덤에 묻고 신주를 들고 궁궐로 돌아올 때도 출입문은 창경궁의 홍화문이었다. 장례는 슬픈 일이었으므로 가급적 창덕궁을 통하지 않고 부차적인 궁궐인 창경궁을 통하도록 한 결과로 풀이된다. 창경궁의 정문은 궁궐의 규모에 비하면 규모가 크고 특히 정문의 출입구가 넓고 높다. 이 문은 왕의 시신을 모신 행렬이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출입구를 여유 있게 꾸민 결과였다.

Infokorea 2016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제작진과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정보를 제공합니다. 또한, 한국의 문화, 사회, 역사, 경제 관련 주제를 특집으로 제공합니다. 2016년 호의 주제는 '한국의 궁궐'입니다.

발행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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