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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

한국의 궁궐 - 2

한양에 세운 조선왕조의 다섯 궁궐

정궁 경복궁의 창건

조선왕조가 건국하고 3년째 되던 1394년에 국왕 태조(재위: 1392-1398)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 풍수지리에 밝은 관리들과 승려들이 전국의 여러 곳을 찾아 나선 끝에 한반도의 한가운데를 동에서 서로 흐르는 한강 하류에 접한 한양이 선택되었다. 한양 역시 개경과 마찬가지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였다.

궁궐은 주산인 북악산 아래 완만한 경사지에 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궁궐 정문 앞으로는 남쪽으로 넓고 곧은 도로를 열고 도로 좌우에 중앙 정부의 주요 관청들을 배치했다. 뒤에는 해발 342미터의 북악산이 우뚝 솟아 배경을 이루었다.

조선 건국의 주도 세력은 신유학으로 무장한 사대부 계층이었다. 이들이 고려를 타도하는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권문세족들의 지나치게 많은 재산 소유와 불교 세력의 사회적 폐단이었다. 고려는 왕실에서부터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불교 사찰은 많은 토지를 점유하여 국가의 재정을 약화시켰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신흥 사대부들은 유교를 통치의 기본으로 삼고 불교사원의 재산을 몰수하여 새 왕조건설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했다.

새 왕조의 도성인 한양은 유교의 통치 이념을 실현하는 장소였다. 국왕이 거처하는 궁궐은 유교 이념 실천의 상징적 시설이 되었다. 북악산 아래 남향해서 좌우에 늘어선 관청을 내려다보는 궁궐의 모습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며 정치를 펴는 군주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만 1년이 지난 1395년 태조는 시위하는 군사들의 호위 속에 경복궁에 들어갔다.
서울의 다섯 궁궐 위치

도성 동쪽의 이궁 창덕궁 창건

경복궁이 완성되고 태조가 경복궁을 거처로 삼고 불과 3년이 지나지 않아 왕실에 큰 변고가 생겼다. 태조에게는 여덟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왕은 막내인 여덟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세자에 책봉했다. 조선 건국에 큰 공로를 세웠다고 자부하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에 불만을 품고 건국 7년째 되던 해에 난을 일으켜 자신의 배다른 동생 세자를 죽였다. 정변에 충격을 받은 태조는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고 둘째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이방원에게 있었다.

새로 즉위한 2대 왕 정종(재위: 1398-1400)은 정변으로 어수선한 한양을 버리고 옛 수도였던 개경(개성)으로 돌아갔다. 결국 경복궁은 지은 지 4년 만에 빈 궁궐이 되고 말았다. 명목상 왕위에 올랐던 2대 왕은 2년 만에 동생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겼다. 새로운 국왕 태종(재위: 1400-1418)은 다시금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

다만, 부친이 세운 경복궁에는 들어가기를 꺼려서, 도성 안 동쪽에 새로 작은 이궁을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 짓고 그곳을 거처로 삼았다. 처음 지었을 때 창덕궁은 작은 규모였지만, 이곳에서 실제로 궁궐의 각종 의식이 거행되면서 건물을 확장할 필요가 생겨 정전을 증축하고 정문도 추가하는 등 태종이 왕위에 있는 사이에 본격적인 궁궐의 격식을 두루 갖추었다. 태종은 한양의 물길을 바로잡고 도로를 정비하는 등 도시의 골격을 정비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1418년 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4대 세종(재위: 1418-1450)은 미처 정돈되지 않은 국가 체제를 바로잡고 문물을 정비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국가적인 유교 의례를 갖추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경복궁을 왕이 머무는 정궁으로 삼고 유교적 의례에 적합한 공간으로 재편성했다. 세종의 노력에 의해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정궁다운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반면 창덕궁은 숲이 우거지고 물이 흐르는 자연 경관을 살린 아늑한 궁궐로 자리잡았다.

대비들을 위한 별궁 창경궁

1469년, 제9대 임금 성종(재위: 1469-1495)이 즉위할 때 나이 13세였다. 왕실에는 할머니가 한 분, 어머니에 해당하는 대비가 두 분이 있었다. 어린 왕을 대신해서 7년 동안 할머니가 나라 일을 보는 체제를 취했다. 어린 왕이 앉은 뒤에 발을 늘어뜨리고 그 뒤에 왕대비가 앉아서 정치를 하는 방식이었다. 왕이 20세가 되어 직접 정사를 보게 되자 왕은 할머니와 대비들이 편안히 거처할 수 있도록 창덕궁 동편에 새 궁전 창경궁을 짓도록 했다.

1482년 창경궁이 완성되자 이곳은 대비들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인접한 창덕궁에 머물던 상궁이나 나인들, 그리고 후궁들이 머무는 곳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왕실에 장례가 있을 경우, 만 3년 동안 치르는 장례 의례를 거행하는 보조적인 용도로도 쓰였다.

이렇게 해서 도성 한양에는 세 군데 궁궐이 지어졌다. 외국 사신이 오거나 국가의 중요한 의례가 있을 때는 정궁인 경복궁을 이용했다. 그러나 경복궁에는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었다. 풍수지리를 전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경복궁의 위치가 왕이 지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나왔다. 도성의 주산인 북악산이 도성 북쪽의 중앙에 위치하지 않는 점이 결점으로 지적되었다. 또 북악산 아래 자리 잡은 경복궁이 서북쪽에 치우쳐 있는 점도 지적되었다. 도성 정북 방향에 있는 응봉이라는 작은 봉우리 아래에 새로 궁궐을 짓기를 권하는 풍수전문가도 있었다. 응봉 아래 새로 궁궐을 짓는 일은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풍수가의 주장은 왕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창덕궁은 규모는 작았지만 아늑한 환경을 갖춘 곳이었는데, 마침 그 위치가 응봉의 남쪽이었다.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역대 왕들은 경복궁과 창덕궁 두 곳을 오가며 지냈지만, 창덕궁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전란 이후 경희궁의 출현과 동궐과 서궐의 전개

일백 년 가깝게 내전을 거듭하던 일본 열도는 16세기 말에 와서 통일되었다. 통일 후 일본은 1592년 조선을 침공했다. 한국에서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으로 한양의 세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전쟁은 오래지 않아 일본군이 패퇴하여 물러났지만 불에 탄 도성의 복구는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궁궐 복구는 17세기 초에 들어와서야 착수되었다. 당연히 정궁인 경복궁이 먼저 복구 되어야 했지만, 창덕궁이 복구되고 경복궁은 빈터로 남았다. 여기에는 창덕궁이 규모가 작아서 비용 부담이 적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전란 뒤의 불안한 심리가 작용하여 풍수상 결함이 적다고 인정된 쪽이 선택된 배경도 있었다.

창덕궁 복구가 진행되는 도중에 왕위가 바뀌어 광해군(재위: 1608-1623)이 즉위하였다. 1610년 창덕궁이 완성되었지만 광해군은 이 궁에 들어가기를 꺼리고 대신 풍수상 길한 산으로 알려진 도성 서쪽 인왕산 아래 새로운 궁궐을 짓도록 했다. 공사가 진행 중인 상태에서 광해군은 남쪽으로 불과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또 다른 궁궐을 지었다. 이 인왕산 남쪽 궁궐이 경덕궁(뒤에 경희궁으로 고침)이다. 또한 미처 복구하지 못했던 창경궁도 복구했다. 거듭된 건축 공사는 백성들의 삶을 압박했다. 여기에 왕실 가족들에 대한 무리한 탄압이 빌미가 되어 쿠데타가 발생하여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고 제16대 인조(재위: 1623-1649)가 즉위하는 정치 변화가 따랐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쿠데타를 주도했던 신하들이 과도한 정치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왕권은 약화되었다. 신하들의 권력이 증대되면서 정치권력을 쟁취하려는 신하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왕들 중에는 일부 부분적으로 왕권 강화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상황을 전적으로 뒤집지는 못하였다. 이런 상황은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왕권이 약하여 신하들의 주장을 억누르지 못하면서 17세기 이후로 왕이 원하는 대로 궁궐을 크게 새로 짓거나 화려한 치장을 하는 일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런 여건에서 한양의 궁궐은 도성 동쪽의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도성 서쪽의 경희궁 세 곳이 운용되었다. 간혹 왕들은 창덕궁에 거처하다가 궁중에 전염병이 발생하거나 다른 일로 궁을 옮겨야 하는 경우 경희궁으로 거처를 바꾸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창덕궁과 창경궁을 한데 묶어 동궐이라 부르고 경희궁을 서궐로 지칭하는 관습도 생겼다.

19세기말 경복궁의 중건

1863년 12세의 어린 고종(재위: 1863-1907)이 왕위에 오르자 오랫동안 권력층에서 소외되어 있던 왕의 부친 흥선대원군이 전면에 나섰다. 우선 왕권을 압박해 오던 사대부 귀족층을 제압하기 위하여 그들의 세력 근거지인 전국의 서원 대부분을 철폐시키는 과감한 정책을 밀어 부쳤다. 그에 앞서 조선왕조의 정궁이면서 거의 250년 동안 빈터로 남아있던 경복궁을 다시 지었다. 경복궁 중건은 조선 건국 초기의 중앙집권적 왕권을 회복하려는 의지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왕권 회복 노력은 예상치 않은 부분에서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오랫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로 있던 조선은 인근의 일본과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로부터 개방 압력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이들의 요구에 조선은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경복궁에는 서양인이나 일본인 관리들이 드나들었으며 이들 외국 세력은 조선 정부에 각종 불평등한 교역을 요구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정치적 간섭도 커졌다. 중국은 오랫동안 조선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해 왔으며 새롭게 국력을 키운 일본은 중국의 영향력에 제동을 걸려 하였다. 급기야 두 나라는 1894년 전쟁에 돌입하였으며 결과는 신흥 강국인 일본의 승리였다. 이후 일본의 조선 왕조에 대한 정치적 간섭은 도를 더해갔다. 경복궁은 그런 정치적 변동의 주 무대가 되었다.

대한제국 수립과 경운궁 건립

1896년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다가 이듬해에 미국 공사관에 인접한 경운궁으로 옮겨 갔다. 경운궁 터는 16세기 이래로 역대 왕족의 살림집이 있던 곳이었으며 도성 안 거의 중앙에 위치했다.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대내외에 자주 의지를 표명하고자 조선을 황제국으로 선포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아울러 경운궁을 크게 고쳐 지어 황제의 궁궐로 삼았다. 궁궐 안에는 서양식의 건물도 지었다.

고종은 러시아 세력을 이용해서 나날이 조선에 대한 간섭을 더하던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다. 러시아는 한반도 진출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고 일본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결국 1904년 두 나라는 전쟁을 벌였고 일본이 승리했다. 전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간섭은 한층 노골화했다. 결국 1907년 고종황제는 아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경운궁에 은거하였으며 5백년 넘는 긴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던 순종황제(재위: 1907-1010)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로부터 불과 3년 후인 1910년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였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 들어갔다.

Infokorea 2016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제작진과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정보를 제공합니다. 또한, 한국의 문화, 사회, 역사, 경제 관련 주제를 특집으로 제공합니다. 2016년 호의 주제는 '한국의 궁궐'입니다.

발행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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