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S Home | CEFIA Home |  영문홈페이지

문화 포커스

한국 도자기의 역사 - 1

고대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도기

무형(無形)의 흙이 물과 만나고 불의 작용을 거쳐 태어난 것이 도자기다. 대부분의 도자기는 자신의 생년월일이나 만든 사람, 태어난 곳 등을 정확히 설명해 주지 않지만, 그들이 가진 색이나 형태, 크기, 질(質) 등을 통해 우리는 만들어진 시대와 제작지, 재료 등에 대한 특징을 가늠할 수 있다. 이것은 도자기가 흙이나 물, 땔감과 같은 자연적 여건에 가장 많이 좌우됨은 물론, 사용하는 사람들의 풍속습관, 음식문화, 제도 등과 같은 상황에 가장 잘 맞도록 끊임없이 고안되어 온 실용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요소와 과정은 결국엔 도자기의 형태와 크기, 두께와 무게, 색과 질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추동력이 된다. 우리는 도자기에 음식이나 그 밖의 것들을 담아 저장하거나 운반하고, 먹고 마시며, 뱉고 버리는가 하면 다른 물건을 받치거나 덮으며 때로는 감상이나 치장을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의도했든 안 했든 도자기는 대부분 고유한 용도와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도자기의 제작에서 도기나 청자는 점토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백자는 고령토[kaolin]라고 하는 백색 계열의 흙으로 만든다. 따라서 흙에 포함된 성분 차이에 따라 도자기의 색은 다르게 나타난다. 자연 상태의 흙으로도 도자기를 만들 수 있지만, 더 치밀하고 매끄러운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제[수비:水飛]한 흙을 사용하며, 때로는 한 가지 이상의 여러 흙을 조합하여 이상적인 비율을 맞추고자 하였다. 태토는 적절한 점력(粘力)이 있어야 가소성(Plastic Portion)이 생기므로 성형을 할 수 있다. 또 불을 견디는 힘이 있어야 번조가 가능하다.

우리나라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도자기 제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요건은 원료인 흙의 선택이다. 도자기의 뼈대가 되는 흙을 태토라고 하는데, 찰흙(점토)처럼 주변에서 손쉽게 채취하여 사용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산에서 힘겹게 채취하여 분쇄와 정제 등 여러 공정을 거쳐야 도자기 제작에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백자의 원료인 고령토는 일정한 광맥을 형성하고 있어서 점토보다 그 채굴과 정제과정이 까다롭다.

도자기는 편의상 굳기와 치밀도, 유약의 유무, 굽는 온도 등에 따라 토기, 도기, 석기, 자기 등으로 나눈다. 현대에 이르면 이들 단계는 공존하기도 하지만 오랜 도자기의 역사에서 점진적으로 보여준 발전 단계이기도 하다.

도기(陶器)는 earthen ware 라고 하며 700~900℃에서 구워져 비교적 연질인데 시기적으로는 선사시대나 삼국시대 도기 가운데 일부가 여기에 속한다. 유약을 입히지 않은 화분이나 토관, 기와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한편, 한국에서는 토기(土器: clay ware)와 도기의 개념을 구분하고 있으나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워 최근에는 이들을 묶어 '도기'라는 범주에 포함하기도 한다. 석기(석기)는 stone ware라고 하며 1,000~1,200℃에서 구워진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 경질도기와 고려청자도 과학적으로 구워진 온도를 분석해보면 석기에 해당하는 온도—약 1,150℃~1,200℃에서 구워졌다.

자기(磁器 또는 瓷器)는 porcelain이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1,200℃ 이상에서 구워진 것을 말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1,250~1,300℃ 이상에서 구워지고 유약을 입힌, 그리고 완전히 자화(磁化)된 것으로서 고령토로 만들어진 백자류가 여기에 속한다. 중국 원(元)대 이후 명(明), 청(淸)의 백자가 대표적인 예이고, 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경질백자, 일본의 17세기 이후 아리타 일대에서 생산되는 경질백자, 유럽이 18세기 이후 생산하는 경질 백자 등이 '자기'에 속한다.

고대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도기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우리 생활에서 도자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도기(陶器)이다. 도기는 청자나 백자처럼 유려하고 광택이 흐르지는 않지만, 식생활과 주생활, 장례 등과 같이 우리 민족의 삶과 죽음의 모든 과정에 늘 함께했다.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도기가 있었기에 도기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역정을 보여준다. 특히 고대사회에서는 제사나 의례를 통해 사회 통합을 추구하기도 했다. 이때 다양한 도기가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1. 신석기시대 도기
신석기시대에는 본격적으로 정착 생활이 이루어지고 서서히 농경이 시작되면서 음식을 보관하거나 취사를 위한 용기로 도기가 사용되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서울 암사동 유적에서는 겉면에 빗살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밑이 뾰족한 형태의 빗살무늬도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한반도의 중서부지역과 남부지역을 중심으로는 뾰족한 빗살무늬도기가 사용되었지만,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밑이 납작한 형태의 도기가 사용되어 지역적 차이를 보인다. 다양한 도기는 식재료를 저장하거나 직접 불 위에 올려 조리용으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실용했던 도기 외에 무덤 부장용 도기도 있었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유아를 묻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항아리가 출토되었고, 또한 진주 상촌리 유적에서는 옹관 안에서 화장된 인골편이 들어 있는 상태로 발견되어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대형 항아리를 무덤으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빗살무늬토기
2. 청동기・철기시대 도기
청동기시대에는 주거지 안의 한쪽 모서리에 구덩이를 파서 큰 도기를 놓고 그 안에 음식물 등을 저장하였다. 저장용 도기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외에도 소형의 발, 접시, 잔 등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도기들이 제작 사용되었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3세기 전후 본격적으로 철기시대로 진입하게 되는데, 이때에도 여전히 청동기시대처럼 무늬가 새겨지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도기들이 사용되었다. 청동기시대 도기보다는 더 단단해지나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형의 항아리를 비롯해 높은 다리가 달린 두형도기, 시루 등이 사용되었다.

청동기시대 무덤은 지석묘(支石墓)와 더불어 석곽묘(石槨墓), 토광묘(土壙墓), 옹관묘(甕棺墓), 주구묘(周溝墓) 등이 있다. 이들 무덤에서는 아주 고운 점토를 사용하며 표면에는 산화철 액체를 바르고 매끄러운 도구로 문질러서 구운 붉은색 마연도기가 종종 발견된다. 옹관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데,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도기에 시신이나 뼈를 묻는 것이다. 도기 두 점을 합친 것, 도기를 비스듬히 세워놓고 돌로 뚜껑을 덮은 것, 밑에 돌을 받친 후 똑바로 새우고 돌뚜껑을 덮은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철기시대에는 지석묘가 사라진 대신 다른 형태의 무덤들은 청동기시대에 이어 여전히 지속되었다. 목관묘가 사용되는 영남지역의 경우 무덤 내에 부장된 부장품의 질과 양에서 개인 간에 큰 차이와 더불어 집단 간의 차이도 심하게 나는데, 전반적으로 부장용 도기가 점차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철기시대에는 무덤 부장용으로 검은색 마연도기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인구가 증가하고 고대 국가가 성립되면서 도기의 사용은 더욱 늘어났다. 음식 재료와 곡물, 물 등을 저장하는 용도, 조리 용기로 사용한 경우, 음식을 직접 담아 먹는 용도 등 고대인들이 실생활에 사용한 도기는 매우 다양했다.
지석묘(좌), 무문토기호(우)
3. 고구려의 도기
고구려인의 생활에 사용된 도기는 실제 유적에서 출토되기도 했고 벽화고분에 그림으로 남아 있어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4세기 고구려를 대표하는 안악3호분에는 주방, 마구간, 외양간, 우물 등이 한쪽 벽면에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주방과 우물을 표현한 부분에서 고구려인들이 사용한 도기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주방에서는 화덕 위에 커다란 도기를 올려서 음식을 끓이고 있고 그 옆에는 낮은 원 모양의 접시를 차곡차곡 쌓아놓은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우물가를 표현한 벽화에는 우물 주변으로 물을 저장하는 커다란 항아리가 여러 개 놓여 있다. 또 무용 그림으로 유명한 무용총의 실내 생활도에는 장막을 친 넓은 방에서 남자 묘주(墓主)가 손님을 대접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직접 음식을 담아 먹었던 작은 크기의 도기뿐만 아니라 음식을 높게 괴어 놓은 도기까지 다양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몽촌토성 안에서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했던 시기의 온돌 건물지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서 고구려인들이 사용했던 도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직접 생활에서 사용한 동이, 다양한 종류의 항아리, 시루, 세발 달린 단지 등이 확인되었다.

한편, 무덤 부장용 도기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상에 석실을 갖춘 고구려 무덤의 특성상 도굴이 쉽고 대부분 북한과 중국에 있어 조사와 연구가 어렵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무덤에서는 점토판을 조립하여 만든 '부뚜막 명기(明器)'가 부장된 예가 종종 확인된다. 중국 길림성 집안 지역이 그 중심으로 중국 한대(漢代) 무덤에 부장되었던 대표적인 도기와 유사하여 문화적 연관성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 있는 도기(좌), 고구려 도기(우)
4. 백제의 도기
백제는 여러 성격의 유적과 주거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다양한 도기가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백제의 초기 수도였던 하남위례성은 현재 서울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 있는 주거지에서 저장용으로 사용된 도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풍납토성의 주거지에서는 저장용으로 사용된 76cm 높이의 대형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또한, 풍납토성 안에 있는 우물에서는 두레박으로 사용한 도기 항아리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도기는 식재료의 저장에 탁월한 역할을 하였다. 도기는 금속보다 곡물이나 과실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고, 원하는 형태와 크기대로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주거지 안에 두고 사용하였다. 백제 유적에서는 땅을 깊이 파고 대형 항아리를 여러 개 두어 저장 시설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백제는 때에 따라 다양한 도기를 사용하였는데, 굽이 달린 굽접시와 다리가 세 개 달린 삼족기, 뚜껑이 있는 유개합(有蓋盒) 등이 있다. 백제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의 대규모의 국가제사가 있었는데, 각종 산천 제사를 비롯해 시조 동명묘에 대한 제사가 대규모로 거행되었다. 이와 같은 제사에는 엄청난 양의 도기가 일부러 파쇄된 채 폐기되었는데, 일부에는 술이나 음식 등 제물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형기대(筒形器臺), 삼족배(三足盃) 등이 제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무덤은 백제 왕실이 고구려의 후손임을 뒷받침하는 적석총(積石塚)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가 각 시기와 지역에 따라 존재하였다. 묘제(墓制)가 다양한 만큼 부장되는 도기 역시 풍부하고 많았다. 한성백제시대 중앙지배집단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은 서울 석촌동고분군이 대표적이다. 인근의 또 다른 적석총인 서울 가락동 2호분에서는 이전시기와 전혀 다른 새로운 도기인 흑색마연도기(黑色磨硏陶器)가 부장되었다. 흑색마연도기는 매우 고운 태토를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겉면을 문지르면 광택이 난다. 이 도기는 3세기 중반을 중심으로 하는데, 당시 중국 진(晉)나라의 도기에 유행했던 어깨무늬 장식이 많은 점으로 보아 중국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된다.

백제는 시기별, 지역별로 다양한 무덤 양식을 보여준다. 무덤에서는 둥근 형태의 도기 항아리, 목이 긴 형태의 도기 항아리 등을 부장하였다. 특히 옹관묘는 백제지역에서 주로 채택된 묘제로, 2개의 큰 장란형(長卵形)의 도기 항아리의 입술 부분을 맞댄 형태로 크기와 번조 상태 등으로 보아 백제의 도기 제작 기술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백제토기 기대(좌), 옹관묘(우)
5. 신라, 가야의 도기
신라의 생활용 도기는 경주의 왕궁터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것들이 대표적이다. 여기서는 각종 도로시설 및 건물지, 주거지, 우물 등 당시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곳으로 많은 발굴이 이루어졌다. 특히 대형의 저장용 항아리, 손으로 빚어 만든 등잔, 합, 병, 시루, 동이 등 다양한 도기가 출토되었다. 또 신라 말 유적인 경주 월지(안압지)에서도 생활에 직접 사용하였던 도기들이 출토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도기의 표면에 여러 종류의 무늬가 있는 도장으로 찍어 장식하는 인화문(印花文)이 유행하였다. 뚜껑을 덮은 유개합, 목이 긴 병, 시루, 주자 등 도기의 종류가 다양하다. 이 유적에서는 그릇 표면에 용량을 표시한 대형의 도기 항아리가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다—이 항아리의 용량은 당시의 10석에 해당하는 520ℓ였다. 신라와 가야에서 제기(祭器)로 사용된 도기는 무덤의 봉토 주변에 묻힌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신라의 황남대총이나 가야의 대성동고분군에서도 확인된다.

경주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신라 최고 지배층의 무덤은 관이나 곽 위를 자갈로 덮어 쌓고 흙을 덮은 형태인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 주종을 이룬다. 연구에 따르면 4세기에 나타나 6세기 중반까지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유행한 묘제(墓制)로 밝혀졌다. 대표적인 황남대총에서는 1,500여 점의 도기가 확인되었고, 왕의 무덤이었던 만큼 큰 도기 항아리에 가득 곡식과 음식을 담았고 다양한 종류의 도기와 주방 도구를 통해 넉넉한 일상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한편, 경주 일대의 적석목관분에서는 인물이나 동물 밑 특정한 물건을 본떠 만든 상형도기(象形陶器)가 다수 확인되었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사람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의 기마인물형도기와 배모양도기를 비롯해 실제 생활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높은 기대와 같이 부장용으로만 사용되었음직한 도기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신라의 토우는 황남동 소형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이며, 그 생김새에 따라 크게 인물상과 동물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물상은 단순히 인물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출산하는 장면, 춤을 추는 장면,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 등 인간의 여러 행위를 단순하게 특징 잡아 표현하였다. 동물상은 하늘을 나는 새, 땅 위에 사는 동물, 물속에 사는 동물로 나누어진다. 특히 땅 위에 사는 동물 중에서는 당시 신라에서는 서식하지 않았던 개미핥기, 물소, 원숭이가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가야 무덤에서도 상형도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4세기 초 낙동강 하구에서 등장한 오리모양주자는 이후 김해와 마산, 함안, 합천 등 한정된 지역에서도 나타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오리모양주자 이외에도 뿔잔, 배모양잔, 집모양, 짚신모양 상형도기 등이 부장된 바 있다

이렇게 신라나 가야의 무덤에 다량의 도기가 부장된 것은 도기 자체가 부를 상징하였고 어떤 도기들은 일정 계층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척도였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토우장식 장경호(좌), 기마인물형토기 주인상(우)

Infokorea 2018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제작진과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정보를 제공합니다. 또한, 한국의 문화, 사회, 역사, 경제 관련 주제를 특집으로 제공합니다. 2018년 호의 주제는 '한국 도자기의 역사'입니다.

발행 | 한국학중앙연구원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