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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

조선시대 왕의 하루일과와 궁중생활 - 3

왕의 사생활과 건강관리

조선 건국을 전후한 시기에 신진사대부들 사이에서 일부일처제가 강조되면서 왕도 단 한 명의 왕비만 둘 수 있었고, 나머지 배우자들은 후궁으로 차별받았다. 왕비는 정식 혼례를 거친 부인이었지만 후궁은 그렇지 않은 부인이었다. 왕비와 후궁은 거처, 명칭, 신분, 자녀 등 모든 면에서 차별되었다.

예컨대 왕비는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 부현구고(婦見舅姑), 묘현(廟見)의 여섯 가지 가례(嘉禮) 절차를 거쳤을 뿐만 아니라 왕비 임명장인 교명(敎命)과 왕비 도장인 금보(金寶)를 받았고 나아가 중국 황제가 주는 고명(誥命)까지 받았다. 이런 절차를 거친 왕비는 중전(中殿) 또는 중궁(中宮)이라 불렸는데, 그 말은 '중심부에 있는 건물에서 사시는 분'이란 뜻이었다. 경복궁의 교태전이나 창덕궁의 대조전이 중전 또는 중궁인데 실제로 궁궐의 중심부에 있다.

이에 비해 후궁은 중전 뒤의 후미진 곳에 있는 건물에서 살았다. 후궁(後宮)이란 말 자체가 '후미진 곳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정실부인이 아니기에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숨은 듯이 살아야 했다. 후궁은 교지(敎旨)라는 임명장을 받았다.

조선 시대의 후궁 제도는 세종 대에 이르러 정비되었으며 그것이 『경국대전』의 내명부 조항에 법제화되었다. 그런데『경국대전』 내명부 조항에는 왕의 후궁이 품계에 따라 빈, 귀인, 소의, 숙의, 소용, 숙용, 소원, 숙원으로 다양하게 구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품계가 아닌 신분과 후궁이 되는 방법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즉 궁녀나 기녀 중에서 사사로이 왕의 승은을 입고 후궁에 책봉되는 승은후궁과 사대부 출신의 여성으로서 간택 절차를 거쳐 후궁에 책봉되는 간택후궁으로 나뉘었다. 승은후궁과 간택후궁은 비록 같은 후궁이라고 해도 출신과 선발 과정에서 큰 차이를 보였고, 그 차이는 궁중에서의 예우와 역할에서의 차이로 연결되었다.

조선 시대 왕의 후궁 중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후궁들은 주로 승은후궁이었다. 승은후궁들은 대체로 노비나 기생 또는 궁녀 출신이었다. 이렇게 미천한 출신의 후궁이 왕의 총애를 독점하거나 아들을 낳을 경우, 간택후궁은 물론 왕비의 지위까지도 위협할 수 있었다. 이럴 경우는 단순하게 왕비와 후궁 사이의 갈등으로 끝나지 않고 신분제 자체 또는 정치판 전체를 동요시킬 수도 있었기에 정치적, 사회적 파장이 컸다. 예컨대 연산군 대의 장녹수, 광해군 대의 김개시, 숙종 대의 희빈 장씨와 숙빈 최씨 등이 그런 경우였다.

이에 비해 간택후궁이 정치적, 사회적 물의를 빚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었다. 간택후궁들은 주로 왕비에게 아들이 없을 때 선발되었고 대상도 양반관료의 딸로 한정되었다. 따라서 간택후궁은 공적인 만큼 왕의 총애를 받는 일이 적었고, 역할도 아들을 낳는 일에 제한되었기에 정치적, 사회적 물의도 크지 않았다.

왕비와 후궁 본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 역시 차별받았다. 예컨대 왕비의 아들과 딸은 대군과 공주라고 불렸지만 후궁의 소생은 군과 옹주라고 불렸다. 대군과 공주 그리고 군과 옹주는 명칭뿐만 아니라 실제 예우에서도 차별받았다.

예컨대 공주와 혼인한 부마는 종1품의 위(尉)에 봉작되었지만, 옹주와 혼인한 부마는 종2품의 위에 봉작되었다. 공주에게 장가든 종1품의 위는 녹과(祿科)로서 곡식 88석과 포 20필, 저화(楮貨) 10장을 받았으며 이에 더하여 과전으로서 105결(結)의 토지를 받았는데, 옹주에게 장가든 종2품의 위는 녹과로서 곡식 76석과 포 19필, 저화 8장을 받았고 과전으로서는 85결을 받았을 뿐이었다.

아들도 딸의 경우와 비슷했다. 왕비가 낳은 아들은 대군에 봉작되었는데 봉작 연한은 따로 없었다. 반면 후궁이 낳은 아들은 군에 봉작되었으며 7세가 되었을 때 봉작되었다. 대군과 군 그리고 공주와 옹주는 혼인 후 출합해서 사는 집의 규모에서도 차별받았다. 집의 규모가 대군과 공주는 30부(負)였고 군과 옹주는 25부였다.

조선 시대 왕비가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을 낳아 대를 잇는 일이었다. 만약 왕비가 아들을 못 낳으면 후궁이라도 낳아야 했다. 왕이 본부인인 왕비 이외에 후궁을 두어야 하는 이유도 이것으로 정당화되었다. 그 이유는 물론 조선의 군주제도가 세습군주제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조선 시대 왕은 존재 자체가 상징이자 규범이었지만, 왕도 사람인 이상 개인적으로 쉬는 시간도 있었고 노는 시간도 있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왕의 놀이는 몹시 활동적이었다. 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의 경우 틈만 나면 매사냥을 즐겼다. 그러나 왕이 매사냥을 자주 다니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는 비난이 일어나 점차 줄어들었다. 그 대신 왕의 놀이는 격구와 투호 및 활쏘기에 집중되었다. 이 중에서 조선 초기 왕들이 즐긴 대표적인 놀이는 격구였다. 격구(擊毬)란 말 그대로 골프채와 비슷한 봉으로 공을 치는 놀이였다. 그래서 격구는 타구(打毬) 또는 봉희(棒戲)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성리학이 확산되면서 격구는 점점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성리학자들이 놀이와 무예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격구는 왕의 놀이로서는 점차 쇠퇴했다. 그 대신 투호(投壺)가 권장되었다.

투호(投壺)는 화살을 항아리 모양의 호(壺) 안에 던져 넣는 놀이였다. 호에는 둥근 항아리 모양의 원호(圓壺)와 네모 항아리 모양의 방호(方壺)가 있었는데, 투호는 『예기(禮記)』에도 실려 있는 매우 유교적인 놀이였다. 이에 따라 조선 시대 들어 투호는 왕실에서뿐만 아니라 양반가에서도 유행하는 상류층의 놀이가 되었다.

『예기』에 의하면 투호는 잔치에서 주인과 손님이 기예를 겨루던 예법이었다. 투호 준비를 마치면 주인이 손님에게 "저에게 구부러진 화살과 못생긴 호가 있으니 청컨대 그것으로써 손님을 즐겁게 해드리고자 합니다."라고 청한다. 손님은 "선생에게 맛있는 술과 좋은 안주가 있어서 제가 이미 대접을 받았는데, 또 거듭 즐겁게 해 주시겠다고 하시니 감히 사양하겠습니다."라고 사양한다. 주인이 다시 "구부러진 화살이요 못생긴 호이니 사양하실 것이 못 되어 감히 굳이 청합니다."라고 한다. 손님 역시 "저는 이미 대접을 받았는데도 또 거듭 즐겁게 해 주시겠다고 하시니 감히 굳이 사양하겠습니다."라고 다시 사양한다. 그러면 주인이 세 번째로 요청하고 그때야 손님이 허락한다. 이처럼 투호는 예법을 중시하는 유교적 놀이였다. 조선 건국 이후 격구 대신 투호가 왕의 놀이로 권장되는 것은 그만큼 왕 역시도 유교화 되어 가는 것임을 의미했다.

왕은 하루일정이 빽빽하게 짜여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의 호젓한 시간을 갖기란 쉽지 않았다. 조용히 명상에 잠기거나 보고 싶은 책이라도 뒤적이려면 한밤중에나 가능했다. 과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왕이 한밤중에 조용히 독서하거나 상소문을 읽는 것을 을람(乙覽)이라고 했는데, 이는 밤 10시쯤인 을야(乙夜)에 책을 열람한다는 뜻이었다. 실제 밤 10시쯤 되어야 왕은 자기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은 밤의 시간도 자기 혼자만을 위해 쓸 수는 없었다. 왕을 기다리는 무수한 여인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은 밤 11시나 12시가 되어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 챙겨야 할 업무가 이처럼 많기에 그 업무를 만기(萬機)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왕이 병에 걸리거나 업무에 싫증을 내고 태만하게 되면 결재해야 할 공문서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적체되는 공문서 하나하나가 왕에게는 지겨운 업무일 수도 있지만, 이 공문서가 결재되지 않으면 국가조직이 움직이지 않았다. 국가와 백성을 생각한다면 왕은 잠시도 한눈을 팔 여유가 없었다. 병들어서도 안 되었다. 훌륭한 왕이 되려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업무능력과 육체적 건강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조선 시대 국왕은 매우 불리했다. 업무가 철저하게 정신노동이었던 반면 운동할 기회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은 앉은 자세에서 신료들을 접견하였고, 공문서를 읽고 결재할 때도 앉은 자세였다. 자리를 이동할 때는 가마를 이용하였다. 이에 따라 스스로 걷거나 움직일 기회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업무 중 대부분은 공문서와 상소문, 탄원서를 읽는 것이어서 문서를 한정 없이 읽다 보면 눈에 무리가 가곤 했다.

과다한 영양 섭취에 비해 운동이 부족했던 조선 시대 왕들은 대부분 비만, 당뇨, 고혈압 등의 질병으로 고생했다. 이런 질병들은 혈액 순환이 잘 안 되어 생기는 병이었다. 비만, 당뇨, 고혈압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문서를 읽어야 했던 왕들은 거기에 더하여 눈병과 부스럼 병에도 자주 걸렸다. 이런 병들은 국왕의 업무 특성상 피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국왕의 직업병이라 할 만했다.

조선 시대에는 국왕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국정을 살펴보도록 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대책을 세웠다. 내의원(內醫院) 제도와 시약청(侍藥廳) 제도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내의원 제도는 평상시 국왕의 건강을 보살피기 위한 제도였으며, 시약청 제도는 비상시 국왕의 건강을 보살피기 위한 제도였다. 내의원은 궁궐 안에 설치된 국왕 전용 병원으로서 이곳에는 책임자인 제조와 함께 어의(御醫), 의녀(醫女) 등이 배속되었다. 내의원의 어의들은 탕약, 침, 뜸과 같은 전공 분야별로 있었다. 왕은 5일마다 정기적으로 어의들로부터 진찰을 받았으며, 건강이 악화되면 수시로 진찰을 받았다. 진찰은 한의학의 전통에 따른 진맥이었다.

어의들이 진맥하는 방법은 왕의 자세에 따라 달랐다. 앉았을 때와 누웠을 때의 진맥 방법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경우 왕은 앉은 자세에서 업무를 보았으므로 집무실에서 진맥을 받을 때는 앉은 자세였다.

왕을 진맥할 때는 서너 명의 어의가 함께 들어갔다. 여러 명이 같이 진맥해 정확한 결과를 알기 위해서였다. 진맥에 앞서 어의들은 건물 안의 기둥 바깥쪽에 엎드려 기다렸다. 그러다가 왕이 진맥을 받기 위해 의자에 앉으면 첫 번째 어의가 일어나 왕의 왼쪽으로 가서 절을 한 후 왼 손목을 잡아 진맥하고 오른쪽으로 가서 또 절을 하고 오른 손목을 잡아 진맥했다. 진맥은 손목의 삼부맥(三部脉)이라고 하는 세 부분을 짚어보는 것이었다. 진맥 결과에 따라 탕약을 쓸지, 침을 놓을지 아니면 뜸을 뜰지가 결정되었다. 특별한 증상이 없다면 원기를 보하기 위한 탕약이 처방되었지만, 병증이 발견되면 탕약과 함께 침이나 뜸이 같이 처방되었다.

처방된 탕약은 내의원에서 조제되었다. 처방된 약재를 종류별로 정량을 달아 약탕에 넣고 달였는데, 제조 1명과 어의 1명이 조제 과정을 감독했다. 탕약이 다려지면 제조가 먼저 맛을 보아 이상 유무를 확인했다. 이상이 없으면 약탕기의 뚜껑을 덮고 자물쇠로 잠근 후, 쟁반에 약탕기와 열쇠를 얹어 왕에게 가져갔다. 이때 화로를 함께 가지고 갔는데, 탕약이 식었을 때 곧바로 덥히기 위해서였다.

약탕기의 자물쇠를 연 후에는 먼저 탕약을 은으로 된 주발 뚜껑에 조금 따라 내의원 도제조가 맛을 보았다. 혹시라도 독이 들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이상이 없으면 은으로 된 주발에 탕약을 따라 왕에게 올려 마시게 했다.

침을 놓게 될 경우에는 먼저 침의(鍼醫)들이 모여 혈(穴) 자리를 논의해 결정했다. 그 혈에다가 침을 놓아도 좋은지 왕에게 보고하고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면 침의들이 들어가 침을 놓았다. 침을 놓기 전에 수석 어의가 아무 혈에 침을 놓겠다고 아뢴 후에 침의가 침을 놓았다. 뜸을 뜨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평상시에는 내의원에서 이런 방식으로 왕의 건강을 관리하다가 왕이 중병에 들면 시약청을 설치하고 24시간 비상 대기하며 치료했다. 시약청에는 물론 내의원의 어의들이 배속되었다. 시약청은 왕이 중병에 들었다는 표시였으므로 시약청의 설치는 곧 나라 전체의 비상사태였다. 그래서 시약청이 설치되면 양반 관료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왕의 건강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숙종 승하 직전 예조정랑이었던 권상일은 시약청이 설치되었을 때의 상황을 일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묘시(卯時, 오전 5~7)에 의관이 와서 말하기를, '밤사이 주상의 몸 상태가 특히 심한 것이 여전하다.'고 하였다.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주상이 의관에게 명령하기를, '수라를 물에 말아 먹으려 했지만 끝내 먹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민진후는 개성유수였는데 시약청을 설치한 후 억지로 왔다가 어젯밤에 죽었다. 그 동생 민진원이 내의원 제조에서 면직되고 대신 조태구로 교체되었다. 미시(未時, 오후 1~3시)에 시약청에서 들어가 진맥했는데 여러 증상이 특히 심한 것이 여전하였다. 복부가 어제보다 더 퉁퉁 부어올랐는데 물똥 2홉을 누셨다.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물똥 약간 누셨다. 만측과 몽여 삼촌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문을 들으니 정오에 주상의 중완(中脘-복부)에 뜸을 떴는데 쑥뜸을 절반만 태우고 곧바로 치웠는데, 이유는 주상의 원기가 뜸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약해서 부득이 시험만 해보고 열기가 침투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다고 한다.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의관이 다시 들어가 진맥했다. 맥이 크기는 하지만 힘이 없었다. 여러 증상은 정오 때와 같지만 복부가 더 부었다고 명령하셨다. 그때 물똥 약간을 누셨다. 술시(戌時, 오후 7~9시)에 의관에게 명령하기를, '어제부터 목구멍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났는데 오늘 더 자주 나니 왜 그런가?' 하였다. 의관이 아뢰기를, '복부가 더 붓고 수라를 들지 못하는 이유는 변도(便道-항문)가 활삭(滑數)하기 때문입니다. 삼령차(蔘笭茶)를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물똥을 반 홉 누시고 삼령차를 드셨다. 인경(人定, 밤 10시 전후) 때에 소변을 4홉 누셨는데 색이 누랬다. 2경 4점(밤 11 전후)에 의관에게 명령하기를, '인삼탕 반 홉을 들었다.'고 하였다." (권상일, 『청대일기』, 경자(庚子, 숙종 46, 1720) 5월 13일)

Infokorea 2016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제작진과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정보를 제공합니다. 또한, 한국의 문화, 사회, 역사, 경제 관련 주제를 특집으로 제공합니다. 2016년 호의 주제는 '한국의 궁궐'입니다.

발행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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