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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

한국의 궁궐 - 5

대도시 서울에 남은 다섯 궁궐의 실루엣

다섯 궁궐의 수난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통치 기간에 서울에 있었던 다섯 궁궐은 적지 않은 수난을 겪었다. 이미 국왕이 존재하지 않는 시점에서 궁궐은 존립 기반을 잃었다. 순종황제가 거처하던 창덕궁은 비교적 건물이 보존된 편이었지만 나머지 빈 궁궐들은 공원으로 쓰이거나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다른 용도로 쓰였고 이 과정에서 건물들은 대부분 철거되었다. 경희궁은 학교로 전용되면서 본래 모습을 잃었고 경운궁은 명칭을 덕수궁으로 변경된 후 역시 중심부 일부만 살아남았다. 창경궁은 각종 식물을 기르고 동물들을 모은 놀이터로 바뀌었으며 경복궁은 식민지배의 본부인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이 앞부분에 세워져 궁궐의 면모를 훼손시켰다.

궁궐의 복구

1945년 광복 후에도 궁궐들은 여전히 시민들의 공원으로 이용되었다. 이들 궁궐을 그 터만이라도 온전하게 보존하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경희궁을 제외한 네 궁궐이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더 이상의 훼손과 변형을 막을 수 있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서울대공원에 동물원이 만들어지면서 창경궁에 있던 동물들을 모두 옮겼고 창경궁은 부분적으로 본래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1990년대에 와서는 그 동안 방치되어 왔던 창덕궁과 경복궁의 복구가 시작되었다. 특히 1995년에 있었던 경복궁 정면 앞의 옛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 철거는 이런 궁궐 복구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건물 철거에 대해서는 그대로 보존해 두자는 의견들도 있었지만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철거했으며 이후 경복궁의 중심을 이루는 중요 전각들은 하나씩 둘씩 복구되었다. 2010년 8월에 있었던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을 본래의 재료와 형태로 복구한 것은 궁궐 복구의 정점을 찍는 일이었다고 하겠다.

서울의 중심가로, 세종대로

광화문이 복구되자 광화문 앞으로 펼쳐져 있던 과거 6조대로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이 길은 1946년부터 세종로라고 불리었다. 세종로라는 이름은 조선 제4대 왕인 세종이 이 부근에서 어린 시절 살았던 데서 부쳐졌다. 이 도로는 조선시대에도 온 나라의 가장 상징적인 곳이었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로로 쓰였다. 본래 50미터 정도였던 폭이 1970년대에는 100미터로 확장되어 서울에서는 가장 넓고 가장 눈에 띄는 도로가 되었다. 이 가로(街路)는 2010년에는 세종대로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세종대로는 서울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대로 북쪽 끝에 자리 잡은 경복궁은 그 뒤에 우뚝하니 자리 잡은 북악산과 함께 서울을 상징하는 명소로 이름 높다. 경복궁 동쪽의 창덕궁과 창경궁은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룬 독특한 곡선의 미를 뽐내는 건축의 박물관과 같은 곳이다. 특히 창덕궁 후원의 울창한 숲과 연못, 그 사이에 보일듯 말듯 서 있는 건물들의 물결은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경희궁은 상대적으로 남아있는 유적은 적지만 우람한 바위산을 배경으로 한 건축의 힘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도시 한 복판 덕수궁은 서양식 건축과 전통적인 건축이 한 데 어울려 있는 특별한 곳이다. 주변에 있는 많은 빌딩에서 근무하던 젊은이들이 잠시 이 궁궐에 들어와 나무 밑 벤치에 앉아 한가한 휴식을 즐기는 모습은 서울의 궁궐이 주는 또 다른 실루엣임에 틀림없다.

Infokorea 2016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제작진과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정보를 제공합니다. 또한, 한국의 문화, 사회, 역사, 경제 관련 주제를 특집으로 제공합니다. 2016년 호의 주제는 '한국의 궁궐'입니다.

발행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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