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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

한국 도자기의 역사 - 4

분원의 민영화와 전통요업의 변화

19세기 이후 빈번한 왕실의 행사로 기명의 필요 숫자가 대폭 증가하였고 또한 진상체제의 이완으로 중간 사취의 증가에 따라 분원의 생산량은 일정 규모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또 상품경제의 발달과 분원의 사번(私燔) 증가로 인해 일반인들의 분원자기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고 이윤축적이 증가하면서 각지에 사기점이 생겨났다. 원칙적으로 국왕과 왕실가족 등 특권계급만이 사용 가능했던 분원 그릇이 시장에 판매됨으로써, 돈만 있으면 누구든지 사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왕실은 1883년 구조조정을 통해 분원의 민간번조를 허용하면서 회사체제로 바꾸고 새로운 운영자로 12명의 공인(貢人)을 새로 선정하였다. 이 때 선정된 공인 12명은 분원의 경영을 맡아 왕실에 납품하는 도자기의 진상과 시장에 판매하는 부분을 모두 총괄하였다.

1883년 민간번조를 허용한 이후 공인들이 운영을 맡았으나 궁궐납품에서 발생하는 미수금 누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고 있었지만, 시장판매를 통한 이윤으로 보전하여 지탱해 나갈 수 있었다. 전국을 대상으로 도자기를 판매했으나 주요 시장은 종로시전이었다. 분원공소는 궁궐과 정부에 그릇을 납품하는 대가로, 서울과 경기지역 시장에서의 그릇 판매특권을 부여 받아 단속 권한을 행사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분원공소에서는 일본 등지에서 수입한 그릇 또한 서울의 시장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상인들을 압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4년경에 이르러서는 채산성이 악화되어 부채가 계속 늘어났고, 근대적 기업으로 거듭나는데 근본적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1897년에 회사로 거듭나 자본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가마가 운영되게 된다.

19세기말 분원 백자는 그릇 두께가 두터워지고 문양은 십장생, 봉황, 물고기, 연지. 운학. 수초, 화훼 등 대담하고 생동감 넘치거나 파격적인 구도로 시문된 것들이 많다. 또 청화백자와 동화백자가 증가하고 청화와 동화를 함께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한 경우가 늘어났다. 또 해태, 복숭아, 두꺼비 등의 상형연적이나 목제와 석재를 모방한 필통등 문구류도 다수 제작되었다. 제작기법의 발달로 다양한 각진 그릇들이 많이 생산되었고 기면 가득 문양을 넣어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이같은 변화는 일반으로 수요자가 확대되고 외국으로부터 다양한 유행이 전해지면서 도자기에도 반영된 것이라 생각된다.
현대 아리타 제품(좌), 현대 사쓰마 제품(우)
흙은 인류에게 가장 오래되고 친숙한 공예재료이다. 중국과 더불어 오랜 도자기의 역사를 지닌 한반도에서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우리 생활에서 도자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도기(陶器)이다. 청자나 눈처럼 정결한 백자는 아니지만 식생활과 주생활, 장례 등과 같이 우리민족의 삶과 죽음의 모든 과정에 늘 함께했던 것이 도기이다.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도기가 있고 이 과정에서 도기는 삶과 죽음에 순응하는 역정을 보여준다. 국내에서는 적어도 9세기말경까지는 도자기의 질이 크게 분화되지는 않았다. 물론 도기 내에서 굽는 온도의 차이나 유약의 유무, 용도에 따라 질과 조형의 차이가 있었지만 도자기는 대체로 금속기나 목기등과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새롭게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중국의 청자와 백자가 사용되면서 도자기 안에서 고급과 저급의 분화가 일어난다. 이같은 도자환경의 변화는 국내에서 청자와 백자를 생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충분히 자기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적 여건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국에 비해 더뎠다. 고려에 이르러 새로운 왕조의 다양한 수요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자기 기술은 국내에서 청자와 백자의 제작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청자는 서해안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약 10세기 이후부터 제작이 본격화되며 11세기까지 청자 발전기에는 청자의 질과 형태, 그리고 문양이 안정된다. 12세기경에 이르면 그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려의 특징이 드러난다. 즉 이미 생활용기로서 자리잡은 청자는 오래 전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오던 도기류나 금속기의 형태적·기능적 장점들을 적극적으로 응용하면서 도자만의 새로운 조형을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상감, 철화, 투각, 양각 기법들이 새롭게 개발되면서 다양한 조형을 이룬다. 동시대 중국과 비교해도 비색자기나, 상감기법 등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고려를 거치면서 도자기는 단지 먹고 마시기 위한 그릇의 경지를 넘어 실내장식, 생활용품, 건축재로서 그 용도와 성격이 확장되었다.

조선(朝鮮)에 이르러 백자는 왕실(王室)이 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이를 위해 '분원(分院)'이라는 왕실용 백자제조장이 약 15세기 후반경부터 경기도 광주군(京畿道 廣州郡) 일대에서 운영되었다. 사옹원은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연회에 쓰이는 모든 식사 공급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소임을 위해 '분원'이라는 전용의 도자기 공장을 관리감독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분원은 사옹원(司饔院) 소속의 관영사기제조장(官營沙器製造場)으로서 19세기 조선말까지 운영되었다. 순백자가 중심이지만 상감, 음각, 철화, 투각, 양각 백자 등이 제작되었고 특히 청화백자는 조선 전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그러나 15세기에 시작된 조선의 관요제도는 19세기에 이르러 관요가 민영화될 때까지 관요의 체제를 유지했다. 물론 장인들의 생계나 민간의 고급백자에 대한 요구 등으로 일반에 판매하기 위한 백자를 동시에 생산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400년 이상 왕실의 관리와 감독아래 있었다. 이는 도자기를 통해 드러나는 조선의 유교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왕실의 뜻이 강했기 때문이다.

의례와 상장례, 연회와 기념행사 등에서 그 성격에 따라 백자는 색깔과 크기, 문양 등에 규제를 받았다. 청화백자를 비롯한 다양한 장식기법이 활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유교적 질서와 검약을 숭상하는 기본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당시 중국이나 일본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면서 달성한 화려한 채색자기의 방향과는 다른 쪽으로 전개되었다. 아마도 이같은 조선의 제도와 보수성이 순백 위주의 단색조의 문양으로 구현되면서 중국이나 일본과 구별되는 조선백자의 미감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Infokorea 2018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제작진과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정보를 제공합니다. 또한, 한국의 문화, 사회, 역사, 경제 관련 주제를 특집으로 제공합니다. 2018년 호의 주제는 '한국 도자기의 역사'입니다.

발행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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