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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

한국 도자기의 역사 - 3

조선의 도자기

1. 분청사기의 제작 배경

분청사기는 청자 태토에 백토로 분장하여 구운 조선시대 도자기를 총칭하는 말이다. 고려 말 청자는 몽골의 침입을 거치고 왜구의 잇따른 침략으로 전반적으로 요장의 작업여건이 악화되었다. 강진과 부안이라는 최고급 청자 생산지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약화되고 여러 경제적, 정치적 상황들로 인해 기술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장인들이 이탈하면서 전국으로 청자 생산지가 확대되었다. 도자기의 질은 낮아졌지만 사용층은 넓어졌다. 강진과 부안의 청자장인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져 터전을 잡게 되면서 각지의 특색이 나타났다. 이같은 현실에서 고려 말의 청자는 유색과 태토의 질이 떨어지고 문양이 매우 간략해지면서 장식기법도 거칠어지는데, 이러한 질의 하락을 감추기 위해 회청색 점토질 태토에 백토를 입혀 분장(粉粧)한 후 그 위에 투명한 유약을 시유한 자기로 다양한 방법으로 무늬를 추가하기도 하였다. 쉽게 말하면 거칠어진 태토를 감추기 위해 분장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 건국과 함께 지방에서 중앙으로 공납하는 공물(貢物)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분청사기도 공납을 받는 대표적인 상품으로 선택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디자인과 장식 등에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는 분청사기가 제작되었고, 조선 초 중앙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관청이나 일반에서도 사용하게 되었다. 이때 사용된 분청사기는 고려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상감과 무늬도장을 이용한 인화기법을 사용한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2. 분청사기의 여러 가지 기법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의 쇠퇴한 질 극복하고 조선왕조가 수용하게 되면서 16세기말 경까지 약 200년간 유행하였다. 처음에는 형태와 장식기법에서 청자를 계승하였지만 점차 분청사기만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분청사기의 장식방법은 다양한데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르다.

장식기법은 상감, 인화, 박지, 음각, 철화, 귀얄, 덤벙기법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상감(象嵌)기법은 고려시대 상감 청자의 기법을 계승한 것으로, 문양의 소재도 고려 상감청자와 비슷하다. 이 기법은 주로 백토(白土)만을 사용한 선상감(線象嵌)과 꽃잎과 같이 면을 장식하는 면상감(面象嵌)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고려 말 상감청자와 다른 점은 백상감의 면이 넓어져 면상감의 비중이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인화(印花)기법은 그릇의 형태를 만든 후 덜 굳은 상태의 그릇의 표면 위에 무늬가 있는 도장으로 장식하고 그 부위에 백토를 바른 다음에 긁어내어 무늬를 백색으로 드러나게 한 것이다. 이 기법은 도장을 사용하여 규격과 품질을 어느 정도 일정하게 맞출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국가에 공납하는 그릇으로 선택되어 전국각지에서 비슷한 형태의 인화분청사기가 제작되었고 관리의 편리를 위해 각종 명문(銘文)을 새기기도 하였다. 인화는 국화, 나비, 연판, 꽃, 원, 새끼줄무늬 등 다양한 무늬가 있으며 그릇 전체에 빼곡하게 장식한다. 무늬 종류나 구성의 큰 변화 없이 정형화된 틀을 유지하면서 생산되다가 점차 인화의 장식 상태가 거칠어지고 약화되며 16세기에 들어서면 거의 사라지게 된다.

그 외에 귀얄기법은 그릇의 표면에 돼지털이나 말총 등으로 만든 거친 붓으로 그릇 표면에 백토를 칠하여 자연스럽게 그 붓질의 결과 질감이 무늬로 나타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덤벙기법은 다른 장식 없이 기물의 전체나 부분을 백토물에 담근 것이다. 분장이 완벽하게 된 경우에는 백자와 혼동되는 경우도 있는데 분청사기 가운데서 늦은 시기에 유행하며 '백색' 지향의 산물로 이해되기도 한다. 다음으로 귀얄을 사용하여 백토를 바르거나 백토물에 담궈 분장한 후 표면에 문양을 그리고 바탕을 긁어내어 본래의 태토가 드러나게 한 박지(剝地)기법, 그릇의 일부, 혹은 전면을 백토로 분장하고 시문하려는 문양을 가늘게 선을 파내어 태토의 색이 드러나게 하는 음각(陰刻)기법등도 있다.

분청사기 장식법 가운데 가장 독특하며 활달함이 두드러지는 기법으로 철화(鐵畵)를 들 수 있다. 그릇의 표면을 백토로 분장을 한 후 그 위에 철분이 많이 함유된 안료로 문양을 그린 것이다. 구워지면 문양은 짙은 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나타난다. 붓으로 그리는 것이어서 같은 무늬라 하더라도 추상적인 것, 회화적인 것, 도식적인 것 등으로 표현방식이 다양하다. 이 기법은 15세기 후반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일대에서 집중 생산하였는데, 이 지역에 약 40여기의 가마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기법을 가진 분청사기는 앞에서도 일부 설명한 바와 같이 지역에 따라 선호한 기법이 약간씩 다르다. 경상도에서는 인화분청이 대세를 이루고 충청도 공주 계룡산지역에서는 철화분청사기가 집중 생산되었다. 또한 박지와 음각기법은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생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시기에 따라서도 유행하는 기법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초반에는 상감과 인화분청이 대세를 이루다가 15세기 후반부터는 귀얄과 덤벙 분청이 보다 성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자나 백자에 비해 태토가 거칠고 유색도 어두운 경향이 있지만, 각지의 개성이 잘 드러나 문양들이 자유롭고 지나치게 격식에 매이지 않아 생동감을 준다. 특히 백토 바른 귀얄로 그릇표면에 활달하게 그려낸 귀얄분청에서는 시원함과 리듬감이 느껴지고, 철화안료로 꽃과 물고기 등을 자유분방하게 그려낸 철화분청에서는 여유로움과 해학,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분청사기

3. 명문이 있는 분청사기와 그 의미

무늬를 도장으로 찍어서 표현하는 인화분청사기에는 다른 기법의 분청사기와 달리 명문(銘文)이 많다. 명문의 종류도 자기를 납품할 관청명부터 생산지를 나타내는 지방명, 제작시기, 사용처나 등급 표시, 제작자의 이름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특히 관청명과 지방명에 많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조선 초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자기의 공납체계와 관련이 있다.

조선은 나라를 세운 후 왕실과 중앙관사, 지방관사 등에서 필요한 그릇을 각지에서 제작한 후 완제품을 공납받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 말의 혼란한 상황과 조선 초의 제도가 정비되지 않는 상태에서 각지에서 납품받은 도자기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폐단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국가는 공납자기에 명문을 새기게 하였다. 관사명(官司銘)이 새겨진 분청사기의 출현은 분청사기를 공물로 받아들이는 단계에서부터 사용 후 관리까지 생산과정에서부터 사용처별로 각 해당관청의 이름을 새겨 만들고 공납된 이후의 관리 또한 사용처별로 나누게 함으로써 생산에서 사용 후 관리까지의 과정을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특히 대표적 분청사기 가마터로 알려진 전남 광주 무등산 충효동요지에서는 굽 안에 장인의 성이나 이름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명문이 다수 확인되었는데, 그릇의 효율적 수취를 위한 조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4. 조선왕실과 백자

조선의 백자는 흙으로 빚고 유약을 입혀 1,250~1,300℃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치밀한 도자기이다. 특히 고령토 Kaolin 계통의 태토를 사용하기에 순도 높은 백색의 자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흙의 선택과 정제는 물론 성형과 번조과정이 까다롭다. 특히 점성이 많고 가소성이 낮아 대형기의 성형은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 초부터로 이미 10세기경부터는 한반도 중부지역의 자기요장에서 청자와 함께 백자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도적인 틀이 갖추어지고 생산품의 규준이 마련되면서 본격적으로 제작이 이루어지는 것은 조선 왕실이 경기도 광주군에 사옹원司饔院 산하의 '분원分院' 도자기 제작소를 설치하는 15세기 후반부터이다. 왕의 일상식과 궁중연향, 사신접대 등 격식과 절차가 수반되는 음식관련 업무가 사옹원 소관이었으므로 분원은 15세기 이래 19세기말까지 조선의 백자 제작을 주도하였다.

15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 지역에 조선의 관요를 설치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왕실과 각 관청에서 사용할 질 좋은 도자기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조선 전기부터 관요에서 생산된 왕실용 도자기는 사용자의 신분과 위계에 따라 쓰임이 구분되어 있었고, 가장 우수한 백자는 임금을 위한 것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내용에 해석을 더한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에는 백자에 대해, "임금의 식사용으로 백자기를 쓴다"고 규정했다. 조선 전기 성현(成俔, 1430~1504)이 기록한 『용재총화(慵齊叢話)』에도 "세종 조에 임금이 사용하는 그릇으로 백자를 전용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관요 설치 이전부터 이미 조선이 도자기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世宗實錄󰡕 「地理志」에 자기소 139개소와 도기소 185개소를 수록한 사실로도 확인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표기된 각 지방의 도자기소 324개소는 세종 당시 도자기가 지방 토산물로서 중앙에 공납하는 중요한 세원이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明에서 요구하던 朝貢品으로 백자를 다량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왕실에서 필요한 일상 생활용기로서 도자기의 대량생산이 점차 절실하였으므로 왕실자기 전문 窯場의 운영은 절실한 문제였다.

왕실에서 일상용 자기의 수요는 태종 연간에서 세종연간까지 한층 증가하였다. 태종-세종연간 왕실에서 부족한 금은 기명의 사용을 금하고 일상기명으로 백자를 사용했는데, 특히 세종 자신도 사치심을 조장하는 금은보다 沙器나 漆器를 기명으로 썼다고 했다. 또 '세종 조부터 백자를 전용하였다'는 󰡔慵齋叢話󰡕의 기록만으로도 세종 이래 왕실에서 많은 양의 백자가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29년(1447) 6월에는 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魂殿에서도 은기를 백자로 대신하였다고 하므로 적어도 1447년경부터는 상당수의 왕실 의례용기가 백자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조선의 자기는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 상업적 성공을 거둔 화려한 채색 자기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아마도 조선의 제도와 보수성이 순백 위주의 단색조의 문양으로 구현되면서 중국이나 일본과 구별되는 조선백자의 미감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분원의 위치를 경기도 광주에 정한 배경에는 한양까지의 거리 및 운반문제를 고려한 것 같다. 󰡔高麗史節要󰡕 공양왕 1년(1389)의 기록에도 멀리 지방에서 왕실용 자기를 제작하여 운반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고 하므로 수도 한양에 가깝고 한강을 이용하여 쉽게 운반할 수 있는 곳이 선정되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왕실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유교적 예제의 실천과 위계적 질서가 근간이었기에 오례五禮로 체계화된 의례의 준행에도 많은 용기들이 필요했다. 기물을 통해 왕실의 권위와 명분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수준에 달하는 공예품을 법식에 맞게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예컨대 왕대비나 임금의 환갑 등에서는 백자나 의장물들을 법도에 맞게 사용함으로써 효(孝)를 다하고자 했던 것이나, 백자 항아리에 술을 담거나 꽃을 꽃아 이상적인 연회의 공간을 구성함으로써 만민화친을 구현하려 한 것이다. 실제로 왕실이 주관했던 여러 연회와 행사에서는 필요한 백자와 기물들을 의궤류의 건기件記나 도설圖說등을 통해 기록으로 남기고 있어 필요했던 백자의 수량과 종류, 조달방법 등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연회의 성격이나 참석자에 따라 백자는 색깔과 크기, 문양 등에 규제를 받았다. 청화백자를 비롯한 다양한 장식기법이 활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유교적 위계질서와 검약을 숭상하는 기본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면, 1795년 수원 화성에서 열렸던 정조대왕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서는 혜경궁 홍씨와 정조, 대군, 내빈 등 격에 따라 음식의 종류가 달랐는데, 이 때 백자의 종류와 개수에도 차등을 두었다.

한편, 상장례 역시 격식이 중요하여 묘제(墓制)에서 사용되는 명기(明器)와 지석(誌石) 등이 백자로 제작되면서 수량과 종류 등에 제약이 있었고, 안태(安胎)의식의 발달로 태장용기를 백자로 제작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특히, 왕실의 상장례와 태장례는 국운과 연관된다고 여겨 의식절차와 기물이 중요했으니 이 과정에서 다양한 매장용 백자들이 발달하였다.

따라서 백자를 제작하기 위해 분원에서 소요되는 백토의 굴취와 운반, 정제와 번조 등 백자를 굽는 전 과정에 대한 왕실과 여러 부처들의 고심과 관심은 조선 초부터 끊임없이 대두되었다. 가마의 구조에 대한 고심의 흔적은 발굴을 통해 알 수 있으니 효율적인 번조를 위해 가마의 길이와 경사는 물론이고 가마내부를 백토로 표면처리하여 정결함을 유지한 것, 갑발을 사용하여 고온과 결백을 추구한 점, 여러 번의 정제과정을 거쳐 태토의 불순물을 제거하려 했던 점 등은 기록뿐만 아니라 유구 현황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5. 백자의 여러 가지 장식 기법

조선시대 백자에는 무늬가 없는 백자의 비율이 높았지만, 여러 가지 기법으로 다양한 무늬를 장식하기도 했다. 백자에 장식된 무늬는 특정한 사용층을 대상으로 하는 그릇임을 나타내 그 자체로 신분의 위계를 표시하는 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주요 소비층의 취향이나 바램을 담아 일종의 시대적인 유행이나 가치관을 반영하기도 했다. 무늬를 장식하는 기법이나 재료는 시대 상황에 맞게 선택적으로 활용되었는데, 장식 기법과 재료의 위계가 구별되어 그릇의 가치와 위상이 다르게 인식되기도 했다.

백자에 장식을 더하는 기법은 평면적인 표현과 입체적인 표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평면적인 표현으로는 백토에 다른 색의 흙을 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상감(象嵌) 기법을 비롯해, 안료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방식의 청화(靑畵), 철화(鐵畵), 동화(銅畵)가 있다. 이러한 안료로 그릇의 넓은 면을 칠하는 경우에는 청채(靑彩), 철채(鐵彩), 동채(銅彩)라 부르기도 한다. 다음으로 무늬를 입체적으로 나타내는 방식으로는 양각(陽刻), 투각(透刻) 기법이 사용되었으며, 무늬가 아니라 입체적인 형상을 표현한 상형(象形) 백자도 제작되었다. 백자에 쓰인 장식 기법은 단독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여러 기법이 섞여서 활용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1) 상감백자 : 조선시대 백자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는 무렵의 이른 시기부터 장식 기법으로 쓰인 것은 청화만이 아니었다. 백자에 앞서 발달했던 청자와 분청사기에서 중요한 장식 기법이었던 상감(象嵌) 기법은 조선시대 백자에도 이어졌다. 조선 백자에서 상감 기법은 대략 15~16세기에 걸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흑색의 선 상감 위주로 나타난다. 15세기 중반경 무덤에 부장된 유물 가운데 상감 기법으로 장식한 묘지와 편병이 알려져 있어 제작시기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2) 철화백자 : 철화(鐵畵)백자는 초벌구이한 백자에 산화철 성분으로 인해 흑갈색을 띠는 안료로 그림을 그려 넣고 유약을 발라 구워낸 것이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철화 안료를 '석간주(石間朱)'라 불렀다. 산화철 성분이 있는 흙으로부터 얻는 철화 안료는 중국에서 수입되던 청화에 비해 주변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철화 안료가 백자의 장식 기법으로 중요하게 활용된 것은 17세기 이후부터이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전반에 걸쳐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황폐해진 조선에서는 무너진 국가 기반을 재건하는 것이 시급했고, 궁궐과 국가 의례에서 쓰일 각종 그릇들도 다시 만들어내야 했다. 그러나 관요에서는 필요한 만큼의 도자기를 만들어낼 물력이 부족했고, 용준과 같이 왕실의 중요한 행사에 사용되던 청화백자는 청화 안료의 공급이 어려워 제작되지 못했다. 17세기 전반의 기록들에는 왕실에서 청화백자의 제작을 위해 청화 안료를 구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안료뿐 아니라 청화백자의 완성품을 중국으로부터 구입해오려는 시도 역시 보이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이에 철화 안료로 왕실용 고급 그릇인 용준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철화백자의 제작은 청화백자의 부족을 대신하기 위한 임시적인 조치였으므로, 청화백자의 제작이 재개된 이후로는 철화백자가 용준과 같은 왕실용 고급 그릇으로 활발히 제작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흰 바탕에 검은색 또는 짙은 갈색으로 드러나는 문양은 마치 수묵이나 서예의 느낌과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철화백자에는 회화성이 짙은 무늬나 시구를 장식하여 문인적인 취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3) 동화백자 : 동화(銅畵) 백자는 산화동 성분의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유약 발라 구워낸 것으로, 붉은 갈색이나 자주빛의 무늬가 나타난다. 동화 기법은 '진사(辰砂)' 기법으로도 불려 왔는데, 명칭의 어원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다. 동화는 조선 전기에는 확인되는 예가 없고 주로 조선 후기에 발달하는 장식 기법이다. 현재 남아있는 유물들로는, 간략한 필치로 꽃과 줄기 등을 나타낸 무늬가 주로 보이며, 민화적인 소재나 길상적인 도안을 표현한 예들도 확인된다.

(4) 양각백자 : 양각(陽刻) 백자는 안료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릇의 표면보다 무늬가 도드라져 보이도록 입체화하여 장식한 것이다. 무늬를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방법으로는 조각칼을 써서 문양 주변을 깎아내거나 틀을 써서 찍어내기도 하며, 따로 찍어낸 무늬를 표면에 덧붙이는 경우도 있다. 또 백토를 점액 상태로 만들고 도구를 사용해 표면에 발라 붙이는 식으로 무늬를 표현하기도 했다. 양각 기법이 백자의 장식에 활용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이며, 양각백자의 제작에는 청화백자와의 관련성이 주목되어 왔다. 장식으로는 모란이나 매화 등 화훼류를 나타낸 예가 많이 보이고 글자를 써 넣거나 장생을 바라는 무늬를 표현한 예도 있다.

그밖에도 무늬를 남겨두고 그 외의 부분을 파내거나 또는 무늬 부분을 뚫어 표현하려는 무늬를 강조하여 장식한 투각(透刻) 백자나 특정한 형상을 본떠 입체적으로 만든 상형(象形)백자는 등이 있다. 전하는 예는 많지 않으나 백자의 장식가운데 가장 난이도가 높고 다채롭다. 주로 문구류나 장식품, 의례용품 등에서 보이며 옥, 상아, 목제 등 다른 공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급 문방용품이 애호되었던 조선후기에 주로 제작되었다.

6. 청화백자

조선 전 기간에 걸쳐 고급 장식으로서 선망되었던 것은 청화백자이다. 초벌구이를 한 뒤 회회청回回靑이라 부르는 코발트 광물 안료로 문양을 그리고 유약을 입혀 구워 백색 바탕에 푸른색 문양이 선명하다. 조선 전기 청화 문양은 궁중에 소속된 화원(畵員)이 분원에 파견되어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부터 전국의 지리와 물산을 파악해 16세기 전반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관요가 위치한 경기도 광주의 토산물로 자기를 들며, "매년 사옹원 관리가 화원을 이끌고" 가서 왕실용 자기의 번조를 감독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화원의 참여는 중국을 통해 수입된 청화 안료가 매우 귀했던 데다가, 평면이 아닌 그릇 표면에 능숙하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정 수준 이상의 그림 실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 전기 가마터 출토품에서 대나무, 매화, 국화, 소나무 등 회화에서도 애호되던 소재들이 백자의 표면에 청화 안료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에서 청화백자가 처음 제작된 시점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15세기 중반의 청화백자 지석이 전하며, 중국에서 들여온 청화자기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보아 상층부에서는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청화백자는 이러한 코발트 안료가 중국 원대에 백자의 채색 안료로 도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원․명대에 걸쳐 발달한 청화백자는 조선에도 일찍부터 전해졌는데, 세종대의 기록을 보면 조선 전기 왕실에 유입된 청화백자는 명나라 황실로부터 선물로 전해지거나, 조선의 사신들이 중국을 다녀오는 과정에서 구입되었다. 청화백자가 유입되면서 조선에서도 새롭게 청화백자의 제작이 시도되었고, 청화백자는 고급품으로 여겨졌다.

성현의 『용재총화(慵齊叢話)』에는 "세조 때에 이르러서는 채색한 자기를 섞어서 썼다. 회회청(回回靑)을 중국에서 구하여 준(樽), 뢰(罍), 배(盃), 상(觴)에 그림을 그렸다"는 내용이 있다. 기록에 나타나는 준, 뢰, 배, 상은 의식과 제사 등에서 쓰이며 술을 담는 항아리와 잔을 부르는 것으로, 조선 전기 왕실에서도 특별한 용도로 쓰이는 고급 그릇에 백자와 함께 청색으로 그림을 그린 자기, 즉 청화백자가 사용되었음을 언급한 것이다.

15세기 중반 왕실에서 청화백자가 고급 그릇으로 사용된 것은 1455년 『세조실록』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왕실용 기물의 제작을 담당했던 공조(工曹)에서 중전이 머무르는 중궁(中宮)의 주방에서 금으로 만든 잔을 만들기를 청하였으나, 명하여 이를 '화자기(畵磁器)' 즉 그림을 그려 넣은 자기로 대용하게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때의 '화자기'는 본래 왕비가 사용할 금으로 만든 그릇을 대신해야 했으므로, 그에 상응하는 정도로 귀한 고급품이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 백자의 사용이 왕실 내 최고위층에 한정되어 있었던 점에서도 금잔을 대신할 만한 그림을 그린 자기는 바로 청화백자였음을 알 수 있다.

문집 수록 내용이나 한양도성 주요 유적 발굴을 통해 중국 경덕진산 민간 청화백자의 출토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 성종 6년(1475)에 "…사대부의 집을 보면 날마다 사치를 일삼고 서로 다투어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그 중에 심한 것을 말하자면 크고 작은 연회에 청화백자가 아니면 쓰지 않는…대저 청화백자는 중국에서 나는 것이므로 실어 날라 오기가 어려운데도 집집마다 있습니다…바라건데 청화백자 쓰는 일을 일체 금지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을 통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위 내용의 청화백자가 중국산인지 조선산인지 명확치는 않지만 귀한 사치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코발트 안료는 중국을 통해 수입한 비싼 것이어서 청화 문양을 능숙하게 그리는 것 역시 당시 조선의 상황으로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초기의 청화백자는 왕실 관요를 중심으로 소량이 만들어졌고 문양을 그리는 사람도 주로 궁중에 소속된 화공들이었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조선전기 청화백자는 병, 전접시, 항아리 등과 같은 특수한 기형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인지 조선에서는 백자에 사용하던 안료 간에 차등을 두었다. 즉 푸른색의 청화 문양이 있는 백자가 대체로 고급이었다. 이는 왕실 행사에서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청화백자와 무문백자가 차등 사용되었던 사실에서 알 수 있으며, 삼성미술관 소장 백자산뢰(보물 제1056호)의 경우처럼 하나의 기물 안에서도 주문양과 종속문양이 있는 경우라면 주문양을 청화로 시문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문양의 유무와 안료의 귀천은 취향이나 기호를 넘어 사용자의 신분에 부합하고 행사의 목적을 완성시켜주는 기준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19세기 이후 청화백자의 수요가 증가 하면서 분원에서도 청화백자 제작이 늘어났는데 조선 말에는 분원의 실상을 보여 주는《분주원보등(分廚院報謄)》에는 장인(匠人) 가운데 청화로 문양을 그리는 화청장(畵靑匠)이 14명이나 되었다. 조선 초 왕실에서 봄, 가을로 화원을 파견하여 정성껏 청화문양을 그리게 했던 때와는 사뭇 달라진 상황이다. 대량생산을 위해 전문적으로 문양을 그리는 장인이 공장에 상주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왕실에서도 귀했던 청화백자는 몇 세기를 거치면서 조선백성들에까지 확대되었다. 값은 비쌌지만 신분을 초월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왕실의 의례로부터 일반의 일상에까지 널리 확장된 것이다. 나아가 청화 외에 산화구리를 주성분으로 하는 동화(銅畵)도 함께 병용되면서 문양이 있는 백자의 확산은 계층과 문화의 벽이 허물어지는 조선사회의 변화를 가장 첨예하게 드러내주는 신호였다.

이처럼 청화백자의 제작이 늘어나면서 18세기 이후 다시 왕실백자에서도 청화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왕실에서도 의례용 외에 감상을 위한 백자들이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군자, 산수, 화조, 시문 등 회화적 구성과 주제를 담아낸 백자들이다. 특히 도자기에 詩를 문양으로 넣은 예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나타나지만 조선시대 이후에는 더욱 다양해지는데, 이는 도자기가 실용을 넘어 선비적 아취를 반영하고 있음이다. 문인들의 자작시나 당송시대 유명한 싯구들이 쓰인 경우도 있고, 그 내용도 일상의 음주 등을 노래한 경우가 적지 않아 흥미롭다.

한편 문인적 아취는 산수문(山水文) 청화백자에서도 느낄 수 있다. 산수문 청화백자는 이상적인 자연공간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기록이나 자료들로 보아도 의례용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오히려 문양을 통해 실용성과 장식성을 극대화하여 산수화첩이나 산수병풍, 산수화폭 같은 회화적 구성을 도자기에 반영함으로써 설치 감상의 목적이 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과정에서 왕실의 산수감상 및 사대부 계층에 이르는 산수시, 산수화의 유행 경향과도 연관이 있다.

또 청화백자에는 길상의 상징을 갖는 문양이나 장식형태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수(壽),복(福)자가 문양도안화 되어 그려지거나 수, 복을 상징하는 복숭아나 박쥐그림이 그려지고, 복숭아와 거북 모양의 상형백자가 만들어졌다. 특히 문자가 있는 장식은 조선후기 기복적인 사회분위기는 물론 왕실의 연례확대 과정에서 孝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증대되면서 장수와 복록을 상징하는 수, 복의 문자문으로 확장된 것이라 여겨진다.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좌),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우)

7. 조선 도공과 요업기술의 일본 전파

일본 큐슈 지역은 17세기 이후에는 일본 최대의 자기 생산지로 발달하게 되는데, 중국과의 교류 역시 상당한 원인이 되었지만 그 전통 속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피랍된 조선도공들의 역사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조선으로 출정하는 장수들에게 조선인 납치령을 내렸다.(島津家文書809, 文祿2년 11월 29일) 조선의 유익한 기술자를 연행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때문에 조선인들을 무작위로 납치하여 그 중 기술자를 골라내곤 했다. 당시 5만~10만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이러한 과정의 일환으로 피랍되었고, 그 중에는 도공(陶工)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전통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포함되었다.

임진왜란은 일명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리우는데, 이는 당시 일본이 관심을 가졌던 새로운 자기에 대한 기술과 조선의 도자문화에 대한 집착을 암시한다. 일본의 장수들은 피랍한 조선인들 중에서 도자기 제작 기술을 지니고 있는 장인들을 별도로 선별하여 도자 제작에 임하도록 하였고 이들을 자신들의 영지 내에 머물게 하며 재정적 지원을 하는 동시에 그 기술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당시 조선도공들은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일대에서 납치되었으며, 대부분 큐슈 지역에 정착하였다. 큐슈 지역은 오늘날에도 일본 도자문화의 중심지이며,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대표적인 조선도공으로 금강(충남 공주 근방) 출신의 이삼평(李參平)과 오늘날 심수관가의 시조인 남원 출신의 심당길(沈,當吉)을 꼽을 수 있다.

납치된 장인들은 초기에 조선의 16~17세기 백자 양식을 구현했고, 기술도 뛰어나 17세기 전반에는 아리타를 관할했던 나베시마 번에서 조선 장인을 중심으로 체제를 재편하기도 하였다. 특히, 납치된 조선 장인 가운데 이삼평은 1616년 이즈미야마에서 백토광맥을 발견하여 일본 자기요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Infokorea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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