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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

한국 도자기의 역사 - 2

고려시대 청자

고려의 청자는 점토로 기물을 만들고 유약을 입혀 1,150℃ 내외의 고온에서 구워낸 도자기이다. 이 때 태토와 유약에는 철분이 포함되어 있다. 고려 초 10세기경부터는 청자와 백자를 구웠으며, 11세기경부터는 700~800℃에서 구워낸 후 유약을 입히고 다시 굽는 2차 번조가 일반화되었다. 청자를 제작하려면 선결해야 할 기술적 요건이 있다. 우선 1,000℃ 이상의 고온을 낼 수 있는 가마시설과, 높은 온도에서 녹는 잿물 유약[灰釉] 기술이 그것이다. 또 푸른빛을 내려면 환원번조의 기술도 전제되어야 한다.

통일신라시대 한반도에서는 이미 유약을 입혀 1,000℃ 이상에서 굽는 시유도기가 제작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청자의 완성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기술발전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려청자의 발달과정은 기술적 요건 외에 정치, 문화적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여 인위적으로 그 완성을 앞당긴 것으로 파악된다.

1. 고려청자 제작 배경
신라 말과 고려 초는 정치는 물론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가 있던 때였다. 이웃 중국도 중원에서는 당(唐), 오대(五代), 송(宋)의 왕조교체가 이루어지고, 북방에서는 거란(契丹)이 세력권을 넓히고 있었다. 신라 말 왕건이 세운 고려는 한반도 중서부 해안을 중심으로 경기도·강원도·황해도 지역을 토대로 성장하였다. 왕건은 개성일대를 중심으로 한 무역활동으로 부를 쌓은 호족집안 출신이었다. 고려는 중국과의 정치적 교류뿐 아니라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더불어 선진의 문화와 문물, 기술을 접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같은 교류를 통해 고려는 이전까지 사용하던 도기와는 차원이 다른 청자와 백자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결국 고려가 새로운 산업인 청자의 국내제작의 토대가 되었다.

다음으로, 통일신라 말, 당시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선종(禪宗)이 당에 유학 갔던 구법승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고, 선종과 함께 선을 수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차와 음다(飮茶) 문화가 유행하게 된다. 당나라 시대에 차는 중국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고 크게 유행하여, 육우(陸羽, 733-804)의 『다경(茶經)』과 같은 책도 등장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다완은 월주요 청자완과 형주요의 백자완으로, 실제 국내 통일신라시대 유적에서는 월주요와 형주요의 다완을 비롯한 중국 도자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음다 관련 중국 수입 자기는 주로 왕실 관련 유적과 대규모 사찰 유적, 주요 해상세력 중심지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어, 당시 상류층과 승려들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차를 마시는 데 필요한 이 같은 자기들은 매우 귀하게 여겨졌던 것으로 보이며, 이런 문화적 맥락에서 청자의 국내 제작 요구가 더 늘어났다.

2. 고려 초 청자기술의 원류와 특징
한국의 청자제작의 기술적인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작설비인 가마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청자 가마의 특징과 변화를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고려가 어떻게 청자 생산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 또 그 기술적 원류는 어디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고려청자 가마는 만들어진 방식에 따라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벽돌을 사용하여 만든 전축요(塼築窯)로 벽돌가마라고도 하며, 두 번째는 진흙으로 만든 토축요(土築窯)로 진흙가마라고도 한다.

벽돌가마와 진흙가마는 여러 측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첫째, 규모를 살펴보면, 벽돌가마는 대부분 총 길이가 약 40m 내외, 폭은 약 2m 내외이고 진흙가마는 총 길이가 10~20m 내외, 폭은 약 1.2m 내외로, 벽돌가마가 진흙가마보다 훨씬 크다. 즉 한번 가마에 불을 땔 때, 구울 수 있는 자기의 양 및 소용되는 땔감, 노동력 등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두 번째로 두 유형의 가마가 주로 위치하는 지역이 다르다. 벽돌가마는 용인, 시흥, 여주, 고양, 양주 등 경기도에서 다수 확인되었으며, 몇 예는 황해도, 충청남도에서도 확인되어 주로 한반도 중서부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흙가마가 만들어진 대표적인 곳으로 전라남도 강진, 해남, 고흥 등이 있으며, 일부 전라북도 고창, 경상북도 칠곡에서도 조사되고 있어, 주로 남서부지역에서 위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세 번째로 두 유형에서 각각 주로 만들었던 자기의 종류와 형태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처럼 두 유형의 가마가 거의 모든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각 가마의 기술적 원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전축요는 중국의 청자기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중국 절강성에 위치한 월주요 기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으며, 토축요는 한반도의 전통적 요업기술의 토대 위에 새로운 중국의 가마 기술의 부분적 수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청자 중 하나가 해무리굽완이다. 굽의 접지면이 넓어 그 생김새가 마치 해무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으로 중국에서는 '옥벽저(玉璧底)'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옥벽저완은 주로 8세기 당나라 시기에 제작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고려 전기의 가마터에 대한 정밀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고려 전기 가마터가 위치한 곳의 지표에서 다수의 해무리굽완이 발견되자 당나라 옥벽저완과 그 형태가 유사한 것을 근거로 고려청자의 개시시기를 8세기 통일신라시기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용인 서리, 배천 원산리 등의 가마터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고고학적 층위가 비교적 분명한 퇴적층이 조사되면서 청자 개시시기 문제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퇴적층에서는 흥미롭게도 해무리굽완이 아닌, 이보다 접지면이 좁은 10세기 오대(五代) 스타일의 이른바 옥환저(玉環底) 완이라 불리는 기종이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최하층에서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고려에서 처음 청자가 제작된 시기는 중국의 오대, 즉 10세기를 전후한 시기 즈음에 시작된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청자음각효문명연화문매병(좌), 청자사자뉴개향로(우)
3. 비색청자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청자 생산이 시작되는 10세기 이후부터 강진이 요업 중심지로 부각되는 11세기까지 청자 발전기에는 청자의 질과 형태, 그리고 문양이 안정된다. 그러나 거란의 침입으로 고려와 북송 공식적인 외교관계에 단절이 생겼으므로 11세기 청자에는 외래적인 특성보다는 고려적인 특징이 강하다. 그러나 12세기경에 이르면 북송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기술적으로도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고려의 특징이 드러났다. 즉 이미 생활용기로서 자리 잡은 청자는 오래 전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오던 도기류나 금속기의 형태적․기능적 장점들을 적극적으로 응용하면서 도자만의 새로운 조형을 이루어 나가게 된 것이다.

인종 원년(1123)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의 수행 기록인《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통해 당시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내용에서 "고려 사람들은 도기 가운데 푸른 빛을 띠는 것을 비색(翡色)이라 한다" 라고 하며 중국인의 눈으로 본 청자향로[陶爐], 청자항아리[陶樽]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는 당시 중국인이 그들의 청자를 '비색(秘色)'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것과 달리 고려인은 자신의 청자를 '비색(翡色)'이라 하여 중국의 그것과 구별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려인들이 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중국과 구별되는 미감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또 淸代에 지어진 《경덕진도록(景德鎭圖錄)》에서도 고려시대 청자에 대해 중국의 이름난 가마인 월주요나 남송관요, 여요(汝窯) 등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참외모양 그릇과 술잔, 사자모양의 향로 등은 중국과 자못 다르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고려청자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독자적인 생산체계와 기술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던 정황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의 비색은 이처럼 12세기를 정점으로 중국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 칭송을 받았다. 중국 남송의 태평노인이 지은《수중금(袖中錦)》에는, "건주(建州)의 차(茶), 촉(蜀) 지방의 비단, 정요(定窯)백자, 절강의 차 …… 고려비색(高麗翡色) …… 모두 천하의 제일인데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라 하여 천하의 명품들 가운데 고려청자를 포함시키고 있다. 특히 백자의 경우 하북성 정요 제품을 제일로 여기면서도 청자에 관해서는 '고려비색'이 천하제일임을 인정하고 있다. 최근 중국 절강의 항주(杭州) 같은 남송대 수도가 있었던 곳에서는 적지 않은 고려청자가 건물터나 황궁터 주변에서 출토되고 있음이 보고 되기도 한다. 대부분이 최상급의 고려비색 청자들이다. 중국으로부터 청자기술을 도입한 지 100여년 만에 중국을 능가하는 기술을 이룬 것이다.

'비색'의 완성은 옥(玉)과 같은 최고의 청자를 추구했던 고려의 미감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바탕에는 발달된 기술력이 전제되어 있다. 1,200도 내외의 온도에서 도자기를 번조하면서 적절한 때에 가마내부의 산소유입을 차단하고 환원염 분위기를 만들어야 비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자가 생활용기로서 자리 잡게 되면서 오래전부터 일반적으로 사용해왔던 도기류나 금속기의 형태나 기능적 장점들을 적극적으로 응용하면서 고려만의 새로운 조형을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청자철화양류문통형병(좌), 청자상감운학문매병(우)
4. 여러 가지 장식 기법
고려 전성기 청자를 생산하던 중심 가마터는 현재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 일대에 주로 분포하며 그 가운데 강진 가마터는 고려 전시기에 걸친 청자 생산지로 유명하다. 이들 가마터에서 발견되는 청자들 가운데는 다구(茶具) 같은 음식기류가 많은 비율을 차지하지만 기와나 장식타일 같은 건축용재 및 화장용구, 문방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와 생활의 각 부분에서 청자가 두루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자는 형태와 제작 방법에서 도기나 금속기와는 다른 독자성을 갖는다. 즉 흙의 특성과 제작의 목적에 따라 도기와는 다른 다양한 제작방법이 시도되는데, 물레성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틀[型]을 사용하여 형태를 만들거나, 부분적으로 문양을 눌러 찍거나, 또는 서로 형태가 다른 부분들을 별도로 만들어 접합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청자는 표면장식에 따라 순(純)청자⋅음각(陰刻)청자⋅양각(陽刻)청자⋅철화(鐵畵)청자⋅진사(辰砂)청자⋅화금(畵金)청자⋅철채(鐵彩)청자 등으로 나눈다. 그 가운데 순청자는 무늬장식이 없는 순수한 청자이며, 음각청자는 순청자 위에 음각기법으로 꽃이나 기타식물 또는 장식 문양을 넣은 경우를 말한다. 양각청자는 무늬를 돋을 새김하여 도드라지게 하는 것이고 철화청자는 유약을 입히기 전에 붓에 철분 안료를 묻혀 회화적 방법으로 무늬를 그린 것이다. 그밖에 그릇의 벽면을 뚫어 장식하는 투각(透刻), 백토(白土)를 바르는 퇴화(堆花), 다른 색의 흙을 섞어 마치 대리석 표면처럼 만든 연리문(練理文)청자와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를 본떠 만든 상형(象形)청자 도판(陶板) 등이 있다. 한 마디로 고려의 장인들은 인간이 흙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방법들이 시도되고 다시 반복되며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그럼 대표적인 기법들을 살펴보자.

(1) 음각기법 : 문양 부분을 칼로 깎아 장식하는 기법을 말한다. 음각기법은 크게 얇은 선을 사용하여 동일한 두께로 깎는 경우와 칼을 눕혀 두껍고 깊게 양감을 주며 깎는 경우로 구분된다. 그 외에 톱니처럼 생긴 도구로 한 번에 그어 꽃의 볼륨감 등을 적절히 표현하기도 했다. 이가운데 가는 선으로 문양을 조각하는 기법으로는 여러 가지 식물문이나 동물, 곤충 등이 그려져는데, 그 가운데 앵무문이 널리 유행했다. 동시기 중국에서는 절강성에 위치한 월주요나 하북성 정요 등지에서 유사한 기법이 유행했으며 문양소재 등도 유사하다. 한편, 비스듬히 뉘어 깎아 문양을 시문한 음각장식도 다수 확인된다.

(2) 양각기법 : 음각과 마찬가지로 기면을 조각하여 문양을 시문하는 방식으로, 시문방법에 따라 칼을 사용하는 조각양각기법과 문양틀(陶範)을 만들어 찍어내는 압출양각기법으로 구분된다. 음각기법의 대표적 문양이 앵무문이라면 양각의 대표적 문양은 연판문이다. 연꽃잎이 이중, 삼중으로 겹겹으로 표현된 연판문은 발, 잔, 접시, 연적, 주자 등에 시문되었다. 그릇에 연판문이 장식될 때에는 주로 외면 전체에 꽃잎이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두드러진다.
압출양각은 기물의 내면이나 외면을 문양틀에 찍어내어 양각의 효과를 얻는 기법이다. 접시나 발과 같은 기물의 내면 전체에 문양이 도드라지도록 하거나 향로 같이 외면을 틀로 찍어 문양을 양각하는 방식이다. 틀을 사용하면 크기와 형태, 장식이 일치하는 기물들을 큰 어려움 없이 제작할 수 있다. 복잡한 기술을 요하는 양각장식을 짧은 시간 안에 대량 생산할 수 있고 숙련된 장인이 아니더라도 제작할 수 있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중기 이후 적극적으로 압출양각기법을 활용하였다. 압출양각 기법은 주로 중국 북방 지역에서 많이 사용된 장식기법으로, 특히 북송대 섬서성에 위치한 요주요(耀州窯)가 유명하다.

(3) 철화기법 : 철화장식은 철분 안료로 기면에 그림을 그린 후 유약을 입혀 구운 것이다. 고려에서 철화자기가 가장 먼저 제작된 곳은 중서부지역 전축요계 요장으로 주로 백자에서 확인되나, 본격적으로 철화자기를 제작한 곳은 전남 해남지역으로 청자로 제작되었다. 해남 진산리에는 80여 개소에 이르는 다수의 청자가마터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주로 태토가 거칠고 전체적으로 황갈색 또는 황녹색 빛을 띠는 조질 청자가 제작되었다. 고려 전기의 표식유물인 해무리굽완이 출토되어 고려 전기~중기 초반에 운영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많은 곳에서 철화로 문양을 시문한 장고, 매병, 장경병 등이 발견되었다. 고려 전기 철화장식은 대부분 장고나 베개와 같은 특수한 기물에서 확인되었다. 이는 상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전기에는 주로 흑색의 철화 및 상감이 특수한 용도의 기물에 한정적으로 활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중기가 되면 여러 종류의 기물에 다양한 문야의 상감장식이 확인되는 것과 같이, 철화 또한 일상의 기물부터 대형기종에까지 여러 요장에서 발견되고 있다. 강진 지역에서는 해남의 철화청자와 비교되는 좋은 질의 아름다운 문양이 시문된 철화청자도 남아 있다.
그러나 중기 이후 이같이 대형기물 전체에 복잡한 형태의 문양을 시문한 철화청자는 극히 드문 경우로, 대부분은 완이나 잔, 접시 등 소형기물에 몇 개의 선이나 점을 이용하여 꽃문양 등을 단순하게 장식하였다. 고려 중기 강진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 태안선 해저인양 청자 중에도 철화로 장식된 잔과 접시, 벼루가 포함되어 있다. 철화로 단순한 문양을 시문할 때에는 대부분의 경우 백토물을 찍거나 그려 장식하는 퇴화기법이 함께 동반되고 있는데, 이는 고려 전기 장고에서부터도 확인되는 경향이다.
붓을 이용하여 검은색과 하얀색의 문양을 기면에 그리는 장식은 중국 북방 가마들에서 널리 활용되었다. 특히 거친 태토의 기물 겉면에 백색흙물을 전체적으로 입혀 백자의 효과를 낸 뒤 기면에 검은색 문양을 시문한 자기를 주로 생산한 자주요와는 문양이나 기형에서 고려와 영향관계가 보인다.

(4) 퇴화기법 : 겔 타입의 백토 용액을 사용하여 그리거나 찍어 기물을 장식하는 기법으로, 단독으로도 사용되지만 주로 다른 장식기법과 동반되어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앞서 본 철화기법과 함께 자주 활용되는데, 철화문양 주변에 점을 추가로 찍거나 선을 덧대는 등 단순한 보조장식기법으로 사용된 예가 많다. 검은색과 흰색 안료를 붓을 사용하여 그림 그리듯 시문하는 전통은 이미 고려 전기에서 확인되고, 중국 북방요장에서도 널리 확인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중기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상감과 비교하여 마치 흑백상감의 효과를 보이는 철화퇴화 장식도 상당하여 다양한 기법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동시기 함께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동화기법 : 산화동을 안료로 사용하여 문양을 시문하는 기법을 동화기법이라고 한다. 환원염 상태에서 짙은 붉은빛을 띠는 동화기법은, 흑백의 상감·철화·퇴화와 함께 청자에 다른 색의 장식이 가능하다. 동화기법이 다른 여러 기법과 함께 활용되면서 전체적으로 기물의 화려함이 더해진다. 극히 드물게 기물 전체에 동안료를 바른 동채청자도 제작되었다.

(6) 화금기법 : 현전하는 유물 중 극히 드물게 청자 표면에 금을 덧칠한 화금청자가 있다. 주로 상감장식을 안팎으로 한 최고급 청자로 유약까지 시유하여 완전히 번조한 상태에서, 다시 그 표면에 금니를 덧칠하고 다시 저온에서 구워 착색하여 화려함을 더하였다. 『고려사』 기록을 통해 13세기 말에 화금청자를 제작하였으며, 이를 원에 바쳤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5. 새로운 상감청자
고려 비색이 정점에 달했던 12세기 어느 시기, 고려인들은 상감(象嵌)이라는 공예기법을 과감히 도자에 적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청자의 경우 몸체에 무늬 부분을 선 또는 면으로 파낸 후, 문양 부위나 또는 바탕에 백토(白土)나 자토(赭土)를 넣어 메우고 다듬어 유약을 입혀 구우면 문양은 백색 또는 검은색으로 나타나고 이것은 청자의 푸른 바탕 위에서 강한 색채의 대비를 이루었다.

상감은 바탕이 되는 재료의 성격이 서로 다르거나 또는 바탕과 색이나 재료가 다른 물질을 집어 넣는[감입: 嵌入] 보편적 공예기법으로 동서양에서 모두 오래 전부터 해오던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기원전부터 상아제품에 철을 상감하거나 도자 제품에 상감으로 장식한 사례가 있었고, 고려의 금속공예에서는 '입사(入絲)'라는 이름으로 금속상감 기법이 사용되고 있었다. 또 고려의 10세기경에 운영되었던 경기도 시흥 방산동요지나 용인 서리요지 등의 초기청자 가마터에서도 이미 확인된다. 극히 일부이지만 자기 장고의 표면에 간단한 상감으로 꽃무늬 같은 문양을 넣은 예가 있었다.

중국 당대부터 금(金)대에 걸쳐 북방지역 하북성이나 산서성 등지의 일부 요장에서도 도자기에 상감 기법이 사용된 예가 있었지만 이들 가마에서는 색깔과 질이 나쁜 흙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표면을 감추기 위해 백토 분장을 하고 그 위에 다시 상감하는 방법이 주로 사용되어 고려가 비색 청자위에 상감하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고려 상감기법은 아마도 비색청자 기술이 절정에 달했던 12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본격적인 생산이 이루어졌으며 12세기말 이후 13세기를 거쳐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강진과 부안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발달한 상감청자는 문양부위에 메꾸어 넣은 흰색과 검은색의 흙이 옥(玉)빛의 푸른 바탕 위에 강한 색채의 대비를 이뤄 이제까지의 청자가 지녀온 단색 위주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다채롭고 장식적인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청자의 대부분은 식기로서 만들어진 것이며, 여러 가지 기물들은 일반 서민용이라기보다는 왕국이나 귀족, 사찰 등이 주요 소비층이었을 것이다. 특히 왕실의 사용이 많았을 것이다. 화려한 고려의 불화나 나전칠기(螺鈿漆器), 금은입사(金銀入絲), 비단 같은 고려의 정교하고도 세련된 공예적 조형이 상당 부분 청자에 반영되었던 것으로서 고급한 생활문화의 일면을 반영한다.

몽골[元] 침입 이후 13~14세기를 지나면서 약간의 고급품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청자의 질은 퇴보한다. 이제 이전과 같은 투명한 비색의 좋은 질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른 이후 국력이 소모되면서 전과 같은 청자제작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제작상의 통제와 집중력이 약화되면서 청자의 문양은 긴장감을 잃게 되고 형태의 유려함과 제작의 공교(工巧)함, 뛰어난 유약, 번조기술 등이 해이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규모가 작은 요장들을 중심으로 간단하고 장식적인 문양시문이 보편화되었다. 가마터 조사에서도 갑발을 사용하는 예가 줄어 들고 손쉬운 생산을 위한 저급한 번조기술이 일반화되었다. 결국 유색이 어둡고 잡물이 많으며 둔탁한 형태를 가지는 청자의 제작이 증가하게 된 것이다.

세계 도자사에서 상감기법은 긴 역사를 지니지만 고려처럼 상감기법을 완성도 높게 구사한 시대는 없었다. 청자 태토와 검정색 및 흰색의 흙은 각각 그 성분조성이 달라, 불을 만났을 때 수축, 팽창하는 비율도 다르다. 따라서 번조과정에서 문양 부위가 쪼그라들거나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고려의 상감청자는 마치 백색과 검정색을 안료로 그림을 그린 것처럼 또렷하고 매끄럽게 표면이 완성되었다. 서로 다른 흙에 대한 이해와 기술의 수준을 보여준 것이다.

6. 음다와 청자
고려시대 청자의 발달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청자를 사용해야 하는 특정한 음료의 발달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차(茶)는 왕실이나 사찰 등의 의례나 손님 대접을 위한 행다 과정에서 보이며, 사료와 개인문집 등에 남아 있다. 청자다구에 대한 내용은 비록 드물지만 고려의 연회나 제례 등 왕실 의례에서 차는 중요한 요소였고, 하사품이나 예물 등으로 오갔기에 청자가 음다의 주요기물로 사용되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 왕실이외에도 불교사원이나 도교사원 등에서 차를 음용하였고, 문인이나 일반에서도 차에 대한 애호가 높았다.

『고려사』에는 차가 약(藥), 향(香) 등과 더불어 왕실 하사품과 의례용품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다구의 종류와 재질도 다양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실기구로 '다방(茶房)'이 있어 조정의 다례나 왕의 순행, 명찰 참례 등에 관여했고 특히 외부 행차 때 다례를 위해 화로와 차 등을 준비하는 일을 했다. 고려 왕실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의례와 절차에서 다례에 대한 법도가 정해져 있어 그 순서와 법식을 다방이 주관했던 것이다.

고려 왕실의 차 관련 의례기록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 말에 성균관 기강이 해이하여 공부를 게을리 하고 정례 제사나 다례에 학생들이 참석 않는 것을 경고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고려 말까지 성균관에서 다례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중죄인을 처벌하는 절차에 왕이 최종 판결문의 내용을 결정하기 직전 의례에서도 왕과 대신들 사이에 차를 올리는 절차가 있었다.

거란이나 여진의 사신이 들어와 왕을 만날 때에도 다례가 있었는데 사신이 가져온 예물 목록을 왕에게 드리면 왕은 인사를 전하고, 예물이 전달되는 과정을 마치면 왕은 차와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특히 사신에게 차를 대접할 때 첫 잔은 왕이 친히 권하는데, 사신도 왕에게 차를 권하고 두 번 절한 후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신다. 그 후 서로 일어서서 손을 모아 인사한 후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이는 왕태자가 신하들을 위해 베푸는 연회에서도 비슷하였다.

그 외 설날의 정월의식에서도 다방에서 주관하여 다례를 치르고 음악, 차, 술이 순차로 진행되었다. 그 외 왕의 맏아들 탄생 축하의식이나 대관전의 백관 연회에서도 다례가 보인다. 백관연회는 관직에 따라 배석하고 다방에서 차를 주관하였는데, 이때 음악연주와 함께 차와 술, 향등이 차례로 시행되었다. 왕자나 왕녀의 책봉의식, 왕실이 주관하는 팔관회나 연등회에도 다례가 포함되어 차와 술, 음악과 춤 등이 함께 어우러졌다. 이처럼 고려 초부터 군사와 백성, 외교사절, 승려 등에게 하사품을 내릴 때 茶는 빠지지 않고 포함되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중국을 다녀온 사신에게 국왕이 주최하는 연회가 있었는데 그들이 가지고 온 중국산 차를 완,구(甌), 탕잔(湯琖) 등의 기물을 사용했다.

한편 사찰에서도 특정 의례와 일상에서 차를 마셨다. 불교사찰의 육법공양에서 주요 품목은 향, 등, 과일, 꽃과 함께 차(茶)가 중요했다. 주지가 주관하는 다례의식, 승당 내에서 이루어지는 다례 등 여러 불교식 의례에서도 그 성격과 참석자의 신분 등에 따라 차를 마셨으니, 역시 여러 종류의 다구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고려시대 사찰유적에서 청자가 출토되고 있어 추측이 가능하다.

청자 가운데, 차와 관련되는 주요 기종은 완, 발, 잔(잔탁), 주자, 타호, 통형잔, 투합, 연, 장고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가운데 주자, 잔 등은 음주와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파악되지만 중국의 용례로 보아 완(碗)이나 대접 종류는 차를 따르고 마시는 용기였을 것이며 그밖에 찻물을 따르는 주자, 찻잎을 갈아내는 다연 등 적지 않은 기종들이 음다 또는 제다(製茶)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7. 청자의 유통과 해로(海路)
최근 몇 년간 서남해안 일대에서는 수 만점에 달하는 고려시대 도자기가 인양되어 한국 도자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였음은 물론, 함께 출토된 금속기와 목간(木簡) 등은 도자기의 종류와 조형뿐만 아니라 선상 생활과 도자의 유통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주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해저매장 관련 신고 된 유물 건수는 고려시대 유물이 전체의 50%로 가장 많고 청자의 수량 또한 많아서 고려시대에 연근해 해상로를 통한 자기 운송이 그 어느 시대 보다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공납으로 물품을 거두어 사용했는데, 이 때 광물, 동물, 해산물, 농산물, 수공업품 등이 이 때 청자를 비롯한 자기류는 좋은 흙이 나는 생산지에서 제작되어 개경 등지로 운반되었다. 이같은 현상 또한 수공업 제품의 수요가 많았던 고려의 수도 개경이나 제2 도시 남경 등지에 물길을 통해 운반하기 쉽다는 지리적 여건에 기인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도자의 제작과 사용의 과정에는 해상로를 통한 유통과 물류의 문제가 중요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유통의 편의와 적절성을 위해 요장의 설치와 선적 등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고려 초 개경인근 가마터의 자기 생산만으로 부족한 공급을 공물로 거두게 되면서 자기 제작지가 확대되며, 고려의 전국적 지배체제 확립과 조세제도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10세기 말경부터 11세기 초에 이르면 조운로에 인접한 서남해안 일대에서 요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해남, 고흥, 강진, 영광, 부안, 보령 등 대부분의 대규모 요지들은 조운로에 위치했던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Infokorea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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