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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유럽 시각에서 바라본 국제적 및 지역적 상황에서 한국학

마리온 에거트 사진
Marion Eggert (마리온 에거트)
Ruhr University Bochum (보훔 루르 대학교), 교수

1. 유럽에서 한국학이 성장하고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요인


한국학은 지난 10년에 걸쳐 유럽에서 전례 없는 발전을 보였다. 우리가 연구하는 분야는 성과가 천천히 드러나는 편이다. 유럽에서 한국학 연구의 뿌리는 무려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구체적인 성과를 보이며 성장한 시기는 20세기 후반이다. 유럽에서 한국학 역사를 모두 추적해 볼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숫자를 통해 이러한 발전을 설명해 보려 한다. 1977년 열린 1차 AKSE 콘퍼런스에서는 6개의 논문만 발표되었지만 가장 최근인 올해 4월 열린 AKSE 콘퍼런스에서는 500개의 논문이 제출되어 160개가 선정되었다.

논문의 엄청난 증가는 유럽에서 한국학이 성장한 덕분도 있지만 AKSE가 창립 후 수십 년 동안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한국학 분야에서 인문학의 주류가 된 이유도 있다. 결과적으로 해외 학자와 한국인 학자를 비롯해 철학적 학습에 관심이 많은 연구자가 AKSE 콘퍼런스에 참여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가 생긴 것이다.

유럽에서 한국학의 성장과 발전은 내외부 네트워킹, 학문적 교류의 조합과 한국학이 인정받는 학문 분야로 발전(또는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유럽에서 종교학, 민속학, 철학, 특히 언어학 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국학은 다양한 과정으로 나뉘어 있으며 현재 모든 하위 분야에 전문가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교육과정과 연구 결과에는 유럽에서 한국학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준 학문적 전통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국제적 분야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유지하려면 인지도가 있는 것이 유럽 한국학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공교육에 대한 자금 및 인력 지원은 항상 불안정하다) 물론 AKSE 콘퍼런스에서도 알 수 있지만, 유럽에서 한국학의 자리매김은 헌신적인 한국인 동료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중에는 친구도 있었고 수십 년 동안 AKSE를 정기적으로 방문한 참석자도 있었으며 한국 지원 기관의 경제적 도움도 있었다.

그리고 한국학이 파생 학문이 아니라 중국학이나 일본학 같은 인접 분야와 대화할 수 있는 동등한 위치에 오른 것에 만족하고 있다.(이것은 국제 한국학의 장점이지 유럽에 기반을 둔 학자들은 해당하지 않는다. 물론 이들도 의식적으로 성심껏 이런 발전에 기여했다)

인문학 부문에서 진행된 더 큰 프로젝트에 기여했던 우리의 노력과 중요한 연구 보조금을 따냈던 성과도 학계에서 한국학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중요 과정이었다. 독일 교육부가 지원(2008~2020년)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보훔 한국학(Bochum KS), 독일 연구 재단(German Research Foundation) 후원으로 베를린에서 열린 특수 연구 분야(Special Research Area) 참여(2012년부터), ANR (French National Research Agency)이 후원하는 파리, 라이덴 및 기타 유럽 도시 간의 협업, 라이덴에서 진행된 저명한 ERC 프로젝트(2014~2019년) 참여를 사례로 들 수 있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유럽 이외 지역에서 이뤄낸 성과도 많았다. 학계에서 한국의 국제적, 역사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한 연구는 힘든 길을 걸어왔다.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노력이 필요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분야(문학, 역사, 종교 등)의 학자들은 비교 연구에서 이슬람 세계, 인도, 중국, 일본과 함께 한국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한국학 분야의 연구진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 개인적으로 독일에서 이 정도 수준에 도달했다는 보고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학계 내부의 요인과 성과만 언급했다. 이 부분은 한국 기관의 재정 지원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이것은 유럽에서 한국학이 자리 잡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론 유럽에서 한국학은 학생 수의 엄청난 증가가 없었다면 제도적으로 이 정도까지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몇 가지 수치로 설명해 보겠다. 1999년 독일 보훔에 부임했을 때 독일 전체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3명의 교수 중 한 명이었다. 2003~2008년 2개 도시에 2명의 교수만 있었다. 현재는 독일 전역에 한국학이 개설된 대학이 6개이며 한국학 학파 소속인 종신 교수도 6명이 있다.(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지는 못하지만, 한국학 교수로 간주할 수 있는 직책/사람도 2~3명 있다) 학생 수의 증가에 비하면 이 수치는 아직 낮기 때문에 계속된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학생 수는 보훔에서만 10배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독일 전역으로 확대하면 30배(3,000%)가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상황을 프랑스와 비교해 보면 현재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라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현재까지 이룬 성과에 만족하고 미래를 낙관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자신을 뒤돌아보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이유가 더 많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성장은 그 자체로 성취라고 생각하기보다 과제에 가깝다. 이런 단순한 사실을 넘어서는 무시할 수 없는 여러 과제가 남아 있다.

2. 도전 과제


유럽에서 한국학은 동·서부 유럽 네트워크의 통합 같은 유럽 고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금은 이 문제보다 다른 대륙 동료 연구자와 관련된 이슈를 언급하려고 한다. 고민하는 과제는 2개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제도 또는 제도적 이슈와 관련이 있으며 다른 하나는 사회 내의 자기 이해 및 자기 역할과 연관이 있다.

1) 제도적 과제
주요한 제도적 과제는 한국학 입지의 연속성 및 안정성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이슈는 주로 독일 상황과 연관이 있으며 개인적인 사례도 독일에서 경험이 될 것이다. 유럽의 교육 시스템은 너무 다양해서 통합적인 관점을 제시하기 힘들다. 하지만 적어도 독일에서 관찰한 개인 경험이 더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학은 유럽 대부분 국가의 유수 대학 교과 과정에 어느 정도까지는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런 현실과 세계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며 문화 수출을 통해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기대만큼 한국학 교수의 입지가 안정적이지 않다. 영국의 경우 대학원 과정에 한국학이 없다. 한국에 대한 수업이 거의 사라진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이 과목을 담당하는 교수가 한 명밖에 없다. 독일의 경우 1990년대 베를린, 2000년대 튀빙겐에서 수십 년 동안 지속하던 종합 한국학 프로그램이 사라지기도 했었다. 이 두 프로그램은 직간접적으로 부활하기는 했지만, 프로그램의 존재를 절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경험을 배워야 했다. 물론 당분간은 이런 불행한 역사가 반복될 것 같지는 않다. 앞으로 10년에 걸쳐 젊은 세대에게 한류의 인기가 떨어지고 학생 수가 급격히 감소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럴 경우 같은 대학 내 다른 학문과의 강력한 네트워크가 한국학의 입지를 유지하는 주요 보호막이 될 수 있다. 자신의 대학에 존재하는 한국학을 통해 연구 또는 합동 과정으로 혜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동료들만 지지를 보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학 자체의 다양화에 대한 요청이 증가할 수 있기 때문에 학제 간 협력 유지가 중요하다.

지금 상황에서는 다른 분야의 동료 연구자가 한국학의 지위를 가져가 버리는 것이 그 지위를 잃는 것보다 관련성이 더 높은 위협이다. 중국학 같은 지역 연구가 학과 내에서 분배되지 않고 보통 독립 팀으로 조직되는 독일만의 특수한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상황에 대한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인문학을 구성하는 독일의 방식에는 이점이 있다. 어떤 대학에서 한국학 학자가 한 명이 있어도 교수직의 명칭이 "한국학"이라면 혼자서 한국학 교과과정을 충분히 구축할 수 있다. 대신 단점도 있다. 한국학 교과과정을 만들려고 하는 대학은 한국학 교수(및 언어 강사 같은 일부 종속 교직원)가 한 명도 없어도 그렇게 할 수 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한국학 학과 모두에 해당하는 상황이다. 이것은 교수 자리를 충원하는 과정에 현지 한국학 교수는 완전히 배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오롯이 한국학을 공부한 젊은 학자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도 한국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학자로 채워지는 결과가 반복되고 있다. "외부인"에 의한 선택도 반드시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새로운 관점을 가진 다른 분야의 유입은 창조적인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완전한 한국학 교과과정을 갖춘 모든 대학에서 종신 교수직을 최소 2개는 정기적으로 마련해야 해결되는 한국학의 상대적 약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2) 학문적 과제
다음은 포괄적인 시각은 아니다. 전체로서 한국학과 관련된 더 큰 과제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개인의 관점과 참여하는 담론의 선택적인 성격에 따라 제한될 수 있으며 다음 의견과 분명 여기에 해당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학생 수의 증가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유럽에서 한국학을 제도적으로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제공 가능한 학문적 노력과 교육의 측면에서 보면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일단 학생 수의 변동에 교수의 수를 맞추기가 어렵고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대학원생이 한국학에 매력을 느끼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음악과 드라마를 비롯한 한국 대중문화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문화 산업을 세계 시장으로 확대하는 계획이 “국가 브랜딩”의 주요 전략이었고 지금까지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한국의 긍정적인 이미지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전달된 이미지가 한국에 대한 관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심지어 한국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의 동기도 그렇다고 볼 수 없다. 특히 한국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대다수의 동기는 한국어(구어)에서 배우려는 목적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한국 글을 비롯해 역사, 문학, 지식 역사 같은 전통적인 표준 과목을 가르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그래서 지적 관심, 한국학 교수, 학생 사이에 큰 괴리가 발생했다. 이런 괴리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계에서 커지는 세대 차이와 일부 관련이 있으며 한국 자체의 빠른 발전 및 지속적인 변화가 주는 효과도 일부 원인이 되고 있다.(우리 세대가 요청하는 한국에 대한 교육은 스스로 호기심을 느끼게 된 한국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삼성, 방탄소년단같이 서구 미디어에서 인기 있는 한국 콘텐츠에서 비롯되기도 했다.(학생들의 관심에서 북한의 존재와 이미지가 차지하는 부분은 크지 않다)

선생님으로서 학생들 교육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의무이지만 이런 상황으로 인해 딜레마에 부딪히게 되었다.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교육과정을 수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연구에 기초한 이상적인 교수법을 고려해 학문적 성격을 유지해야 한다면 이런 방식의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만약 철학적 전통의 수준이 유럽에서 한국학을 전파할 수 있는 포인트라면 이런 전통에서 우리의 교과 콘텐츠를 분리하는 것이 후에 학문적인 커리어를 쌓으려는 학생에게는 폐가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학을 학문적으로 추구하게 되면 학생 기반의 일부를 잃을 수밖에 없다.

재능 있는 젊은 학자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직업 시장으로 들어오려는 준비된 젊은 세대의 수와 제공할 수 있는 자리 사이의 불균형은 상당하다. 직업을 제안 받으면 전 세계 어디든 달려갈 의사가 있는 교육 분야의 전 세계 젊은 학자들은 가혹한 경쟁을 겪고 있다. 일반적으로(물론 전부가 그렇지는 않지만) 한국학 학계에서 통용되고 요구하는 2개 언어가 한국어와 영어이기 때문에 이들은 그럴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관련된 젊은 학자들이 생활 측면에서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학문적으로 최악은 아니다. 두 개 언어를 통한 한국학의 국제적 융합과 학문적 토론의 용이성은 되려 두 언어 사이의 지속적인 코드스위치(두 언어와 어느 정도 연결된 교육 문화 사이의)가 이뤄지면서 높은 수준의 학술적 창의성과 통찰력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국제적인 모바일 한국학 커뮤니티의 부상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지 언어로 교육하고 출판하는 것이 점차 부차적인 수준으로 밀려나면서 자연스러운 국제 대화가 한국에 대한 지역 커뮤니티에 기여하는 부분은 다소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물론 유럽 국가마다 상황이 다르다. 프랑스어나 체코어 같은 일부 언어는 주요 학술 언어로서 독일어보다 영어를 훨씬 적게 제공한다. 하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눈에 띈다) 한국학이 현지 학계와 대중에 근거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즉 비전문가 청중, 미디어, 공개 강의, 번역 같은 광범위한 영역에 진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학은 지지 기반과 완전히 분리된 자기 지시적 뜬구름에 그칠 수도 있다.

여기서 언급한 구름의 이미지는 부연 설명을 위한 것이다. 한자 문화에서 구름은 대체로 꿈을 의미하며 구름과 꿈은 순간성, 갈망, 기대, 상상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된다. 구름이 위대한 비전의 형태와 존재로 상징될 수 있는 이유는 초월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한국학에서 영어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추상적이고 정교한 학문적 담론을 흡수하고 반영하는 능력의 전제 조건이면서 최고 수준의 사상적 유연성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구름은 땅을 기름지게 하는 비를 품고 있는 존재로서 가장 가치가 높다. 지금 요청하려는 것은 구름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비를 내리는 존재임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의견은 우리가 가진 의무의 일부는 지역 사회와 관련이 있지만, 기후변화, 환경 파괴, 삶의 디지털화, 전쟁 예방 같은 인류 앞에 높인 과제를 해결하는 데 한국학이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순진하고 비학술적인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더 머물러 있는 위치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는 있겠지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노력이 지역적, 국제적 입장에서 한국학을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2019년도 한국학국제학술회의 발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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