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S Home | CEFIA Home |  영문홈페이지

문화 포커스

Korea in the World

민주주의의 발전

4·19당시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한국은 급격한 경제성장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로의 이행도 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은 경제 성장에 힘입은 정치적 발전 덕분에 민주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960~70년대의 고속 경제성장이 1980~90년대 민주화 과정의 초석을 놓은 것입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이 경제성장과 정치적 발전을 집약적이고 순차적으로 이루어낸 것은 주목할 만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 덕에 가능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 체제는 군사독재에 맞서 거리에서 저항하고 선거를 통해 조용히 정권을 심판함으로써 스스로 민주적 권리를 공고히 한 시민들 덕에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일본에서 해방된 후 선거로 제헌국회를 세우고 그 국회에서 대통령을 임명하게 한 일련의 과정으로 시작됐습니다. 194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 대통령은 두 차례의 불법적 개헌으로 정권을 연장했습니다. 1960년 4월 이승만 정권이 부정선거까지 자행하자 시민들은 이를 규탄하며 궐기했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며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였습니다.

4·19 혁명을 통해 이승만 정권에 억눌렸던 시민들의 불만과 의지가 다양한 운동과 요구로 분출되었으나, 혁명 후 집권한 민주당 정부는 내분과 갈등으로 당시의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1961년 5월 박정희 장군은 동료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당 정권을 찬탈했습니다. 2년간의 군정 끝에 박정희는 직접선거를 통해 1963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1967년과 1971년에 재선되었습니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인들과 정당의 활동을 금지하고는, 억압적이며 권위적인 ‘10월 유신’을 단행했습니다.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그에 따라 행정·입법·사법 전권을 독점했으며, 필요할 때면 헌법 조항과 무관하게 비상조치를 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헌법의 효력조차 일시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학생들과 지식인들, 개혁 성향의 야당 의원들이 지속해서 유신헌법에 항거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발동시켜 민주화를 요구하는 인사들을 탄압하고 투옥했습니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항쟁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마침내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후 민주화운동은 더 거세졌지만 1979년 12월 전두환 장군이 이끈 군사반란으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1980년 5월 전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전두환의 정권 장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자 군부는 비상계엄을 확대하여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국회를 폐쇄했습니다. 광주의 학생과 시민들은 그런 억압적 조치에 굴하지 않고 계엄을 종식하고 민주화 인사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으나, 그 같은 요구는 군부의 유혈 진압으로 분쇄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전두환은 유신헌법에 따른 간접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대통령 간선제와 7년 단임제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하였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1960년대의 수출 주도 정책과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진작, 1980년대 세계 경기 부양 덕분에 한국의 경제 성장은 지속하였고 중산층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전두환은 정치 권력을 다지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중산층은 민주화보다 정치안정과 경제성장에 관심이 있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민주화운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이에 따른 도시화, 교육 수준의 향상, 미디어 발달로 인해 시민들의 정치적 기대수준과 정치 참여 욕구가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의 정치 참여의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대통령직선제를 위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습니다. 1987년 5월 전두환 정부가 한 대학생을 고문·살해한 사건의 진상을 축소하고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자, 정부의 잔학성에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민주화 투쟁에 합류했습니다. 이른바 6월 민주항쟁에는 대학생과 중산층 시민이 대대적으로 참여했고 결국 전두환 정부가 대통령직선제 요구를 받아들이며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새로운 장이 열렸습니다. 1971년 이래 처음으로 실시된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야당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1979년 군사반란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민주적 변화와 개혁은 계속되었습니다.
6월 민주화운동
1990년 3월 오랜 야당 지도자 김영삼이 군부 세력과 타협해 여야 3당을 합당했고, 1992년 12월 이 새로운 거대 여당의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한 세대 만에 처음으로 문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중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여 1979년 군사반란을 일으킨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해산했습니다. 또한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호 아래 쿠데타의 주역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임 대통령을 단죄하였습니다.

1997년 12월 또 다른 오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대통령에 선출됨으로써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진보세력은 5년 후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으로 연이어 집권했습니다. 2007년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두 번째 수평적 정권 교체가 평화적으로, 이번에는 진보세력에서 보수세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보수세력은 2012년 박근혜의 당선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이어갔는데 박근혜는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습니다. 박근혜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딸로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 덕에 정부 초기에 높은 지지를 얻었으나 2016년 10월 비선에 의해 국정을 운영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통령직 사퇴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촛불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촛불시위에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했고 2016년 12월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였습니다. 그리고 2017년 3월 헌법재판소는 탄핵 소추안을 인용하여 대통령을 직에서 파면하였습니다. 이후 2017년 5월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세 번째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2016년의 촛불시위는, 시민들이 주도한 운동을 통해 평화적으로, 또 민주적 법과 제도적 절차 속에서 대통령 파면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는 경제성장에 크게 힘입었지만, 시민들이 고양된 정치의식을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공고히 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때때로 군부나 권위주의에 의해 훼손되기도 하였지만, 시민들의 저항과 참여와 평화적인 선거를 통해 제도적으로 공고화되었습니다.

Korea in the World
외국인들이 짧은 시간에 다른 나라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Korea in the World (세계와 함께하는 한국)는 한국을 잘 알지 못하는 교육자들을 위한 요약적 한국 소개서입니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의 한국의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정치·경제적 발자취를 모아 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한국을 교과서 안에 넣고 싶은 교과서 집필자와 수업에서 다루고 싶은 교사들에게 최적화된 자료입니다.

발행| 한국학중앙연구원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