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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

Korea in the World

경제 성장

한국전쟁에서 폐허가 된 서울 도심
한국은 1945년 8월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며 급속한 경제성장을 일궈왔습니다. 이 과정을 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이 시기를 세 단계로 나누는 게 효과적입니다. 1단계는 ‘재건’의 시기로 1950년대 6.25전쟁 후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와 무너진 산업시설을 외국의 원조로 복구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2단계는 ‘이륙’의 시기로 1960년대와 1970년대 산업화가 본격화한 시기입니다. 3단계는 다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전기는 1980년대 경제 자율화를 촉진하던 시기이고, 후기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일련의 경제위기를 극복함과 더불어 세계화가 진전된 시기입니다.

1단계 시절 한국은 전쟁으로 산업시설과 기반시설이 파괴된 채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국가에 속했습니다. 국민은 미국과 유엔이 보내주는 외국의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원조를 발판으로 경제부흥과 자립을 이루기 위해 수입 대체 산업화를 추진했습니다. 이 정책은 외국에서 수입해오는 물품을 국내 생산으로 대체하는 것을 촉진하는 경제무역정책으로 공산품의 국내 생산을 늘리고 외화의 유출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1950년대는 미국원조로 원료를 제공받은 제분업과 제당업, 그리고 면직물산업이 성장하였습니다. 수입 대체 산업화는 개발도상국의 전형적 발전 모델로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무역역조 극복을 위해 수출 증대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활로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경제발전의 2단계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기입니다. 한국은 1963년부터 1979년까지 연 8% 이상의 경제성장율을 기록했습니다. 한때 헐벗고 굶주렸던 나라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을 목도한 외국인들은 서독의 부흥을 뜻하는 ‘라인강의 기적’에 빗대어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습니다. 당시 괄목할만한 성장이 가능했던 요인으로는 정부의 수출주도 정책과 투자 촉진 정책, 성장에 유리했던 대외조건, 그리고 풍부한 인적자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우선, 정부는 1963년 외환 보유고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외화 획득 차원에서 수출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마침 기업들이 수출에 성과를 보임에 따라 1960년대 중반부터 확고한 수출 지향적 산업화 전략으로 나아갔습니다. 정부는 1965년부터 1979년까지 매달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열고 해외시장 개척과 수출지원 정책의 수립에 주력했습니다. ‘확대’라는 용어가 쓰인 것은 회의의 참석범위를 정부 관료들에 국한하지 않고 재·학계로까지 넓혔기 때문이었습니다. 박 대통령 자신이 매달 확대회의를 직접 주재했습니다.

1964년 한국은 당초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연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고, 1970년에는 10억 달러, 1977년에는 100억 달러를 기록함으로써 ‘수출의 신화’를 썼습니다. 수출주력 품목은 면직물, 가발 등의 소비재 경공업품에서 점차 중화학공업제품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후에도 수출은 계속 증가해 1995년에 1000억 달러, 2011년에 5000억 달러를 달성했습니다. 수출입 무역총액 또한 1조 달러를 넘어섬으로써 세계 9위의 무역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는 박정희 대통령
수출의 급격한 증가는 무역 진흥을 위한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에 힘입었습니다. 한국은 다자간 자유무역에 참여해 1967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가입했고 1994년에는 세계무역기구(WTO)의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2004년에 칠레와 처음으로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을 필두로 2006년에는 싱가포르와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2007년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2010년엔 인도, 2011년엔 유럽연합(EU)과 페루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으며, 이어서 미국(2012), 터키(2013), 호주(2014), 캐나다, 중국, 뉴질랜드, 베트남(2015), 그리고 2016년에는 콜롬비아와 체결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한국만이 세계 3대 시장이라 할 수 있는 북미, 유럽, 중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유일한 국가라는 사실입니다. 무역과 개방이라는 두 단어 없이 한국 경제 발전 역사를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둘째로 한국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온 요인은 투자입니다. 경제 발전 촉진에 기여한 높은 투자율은 높은 저축률 덕에 가능했고, 외채와 외국인투자까지 더해지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높은 투자율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정부는 1962년부터 수십 년 동안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행하고 다량의 투자액을 중점 산업분야에 투입하는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투자가 지속된 덕에 한국의 산업계는 기자재를 사오고, 고부가 상품 생산에 필요한 생산시설을 갖추고, 연구개발을 통한 기술경쟁력을 제고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1970년대 정부가 중화학공업에 대규모 투자를 함으로써 경공업 위주의 발전에서 탈피해 중공업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기술 역량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조선,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전자, 기계, 건설 분야에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며 한국의 대표적 산업으로 키울 수 있었습니다.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세 번째 요인은 1960~70년대 한국을 둘러싼 국제적 호조건입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한국은 냉전질서 하에서 전쟁을 치룬 분단국가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1950년대부터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를 대거 받아왔고, 원조는 점감하였지만 1960년대 이후에도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기회를 제공받았습니다. 단적으로 1970년대 한국의 생산성은 같은 시기 미국 생산성의 15% 내외에 불과하였지만, 미국 생산성의 30%를 상회하였던 남미와는 달리 비약적 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저가시장를 확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71년을 기준으로 볼 때, 한국의 수출은 미국과 일본에 75% 이상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1970년대에 한국 기업들은 중동 건설 시장에 진출하여 외화를 벌어 국제수지를 개선하고 국민소득을 증대시키는 데 한몫을 했습니다. 아울러 1960년대 후반~1970년대는 선진국이 첨단산업으로 나아가면서 각종 중화학공업이 선진국에서 사양화 추세에 놓임에 따라, 한국이 관련 공업화 분야에 진출하여 성장하기 용이했습니다.

한국 경제의 성장에 기여한 네 번째 요인은 넉넉한 인적자원이었습니다. 1960년대 산업화가 시작될 무렵 한국에는 노동가능인구가 풍부했고 그 수는 계속 증가했습니다. 1950년대부터 정부는 국민들의 교육열에 힘입어 ‘교육입국’을 기치로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도입했고 교육받은 노동력이 풍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정부가 직업고등학교와 전문학교를 세워 숙련 기능인들을 양성했고, 사무직 근로자와 관리자로 일할 수 있는 대학졸업자들도 늘어났습니다. 산업 각 분야에 취직한 노동자들은 각자가 맡은 일에 헌신하며 경제성장을 이끌었습니다. 이와 함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연구기관과 대학들은 연구를 통한 원천기술 개발과 다양한 산업분야의 우수 연구 인력 육성을 통해 지속적 성장을 지원했습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경
이상 언급한 네 가지 요인은 한국의 산업 구조에 크나큰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국내총생산에서 각 산업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1950년대에는 농업, 임업, 수산업이 50%를 차지했으나 1980년에는 15%로 줄었고 현재엔 2.5%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1950년대에 10% 미만이었던 광업과 제조업의 비율은 1960년대 들어 계속 증가했고 1980년 이후에는 30% 정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에 40%를 차지했던 사회간접자본과 서비스산업의 비중은 1980년부터는 약 60%로 확대되었습니다.

두 번째 경제 개발 단계 동안 한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서민들의 생활형편도 개선된 반면, 빈부격차가 커지고 사회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부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와 군수산업 발전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사회와 국민에 대한 억압기제를 강화했습니다. 정부는 지속적 경제 성장과 수출 촉진을 위해 기업이 생산 단가를 낮추도록 해야 했고 이는 임금 상승의 억제로 이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 특히 열악했고 이에 따라 재정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부 노동자들이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투쟁했지만 노동운동은 법에 의해 제한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노동조합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실제로 노동운동이 활발해진 것은 군사독재가 끝나가던 1987년쯤이었습니다. 그후 노동운동, 노사 대화와 협상, 정부의 조정 노력에 힘입어 근로조건이 개선되고 노동자의 권익도 향상되었습니다. 노동운동 활성화를 위시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의 진전은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과 북한의 경제력 격차를 발생시킨 주요한 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열띤 민주화 요구는 그만큼 부패를 방지할 감시 기제를 강화하고 혁신자극 요소를 증가시켰고,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체 인적자원의 효율적 활용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경제 개발 3단계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를 말합니다. 1981년 출범한 전두환 정부는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을 안정 위주의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 심화된 경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중화학공업의 구조조정을 시작하고 산업합리화를 실시했습니다. 산업합리화 과정에서 정부가 중소기업 육성에 힘을 기울인 결과 부품과 중간재를 생산하는 제조업체가 증가했고, 중소기업과 재벌 대기업간의 산업연관도 심화되었습니다. 산업합리화 추진은 일부 산업에서 해당 업체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여 실패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정부의 산업정책은 기업의 자발적 협력을 배제한 상태에서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학습시킨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Korea in the World
외국인들이 짧은 시간에 다른 나라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Korea in the World (세계와 함께하는 한국)는 한국을 잘 알지 못하는 교육자들을 위한 요약적 한국 소개서입니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의 한국의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정치·경제적 발자취를 모아 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한국을 교과서 안에 넣고 싶은 교과서 집필자와 수업에서 다루고 싶은 교사들에게 최적화된 자료입니다.

발행|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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