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하 항일독립운동 (3 ·1운동을 중심으로)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1910년대의 항일운동은 국내외에서 펼쳐졌다. 연해주와 만주를 중심으로 무장독립군 양성과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려는 운동이 활발했다. 국내에서는 비밀결사운동, 교육 종교계의 반일활동이 전개되었다.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에 격렬히 반대하며 토지 분쟁을 일으켰다. 노동자들 또한 1910년에서 1919년 사이에 170여 건의 파업을 일으켜 일제에 맞섰다. 이와 같은 민중의 항일운동은 거족적 항쟁의 기반이 되었다.

1919년의 3·1운동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독립 열망을 담은 전 민족적인 항쟁이었다. 러시아혁명의 성공과 제1차 세계대전 종결로 인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민족독립의 열망이 국외에서 먼저 일어났다. 1917년 중국에서 만들어진 ‘대동단결선언’은 공화정체의 임시정부 설립을 위한 민족대회를 열자는 제안으로 이후 1948년의 ‘대한독립선언’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도 조선인들을 고무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1차대전 패전국의 식민지를 빼앗기 위한 논리로, 전승국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과는 무관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국내외의 민족주의자와 지식인들에게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국내외에서 독립 호소를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였고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독립의 열망은 널리 확산되었다.

1919년 2월 8일 동경 조선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발표가 있었고, 국내 반일 독립운동도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종교계, 학생층은 1918년 말부터 독립선언을 준비하여왔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와 학생들은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했다. 1919년 3월 1일, 종교계의 민족대표들이 불참한 가운데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몰려든 조선인들은 독립만세를 외쳤고, 독립만세시위는 서울, 평양, 원산, 의주와 같은 도시로부터 농촌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3·1운동은 억눌려있던 민족의 독립의지가 분출되어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졌다.

1919년 3월 초의 독립만세 시위는 서울, 경기, 황해도, 평안남북도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종교지도자, 학생, 상인들이 주로 참여하였다. 3월 하순에는 서울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반으로 서울·경기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재차 일어났다. 도시의 상인들은 철시투쟁을 벌였다.

3·1운동은 3월 10일 경부터 지방 군 단위 지역으로 확산되고, 3월 말-4월 초에는 전국적 시위로 발전하여 절정에 이르렀다. 운동의 확대과정에서 농민과 노동자가 주도적으로 시위를 이끌고, 비폭력으로만 일관하지 않았다. 시위가 농촌으로 확산되면서 투쟁방법이 다양해지고, 투쟁 양상도 더욱 격렬해졌다. 많은 인파가 몰리는 장날을 이용한 시위, 횃불, 봉화 등의 시위방법도 사용되었다. 또한 ‘만세꾼’으로 불리는 시위지도자가 생겨나 시위는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농민들은 운동과정에서 괭이, 낫과 같은 도구로 무장하여 면사무소, 군청, 주재소, 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일제의 착취기구였던 금융조합과 일본인 지주, 고리대금업자도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3·1운동 과정에서 농민들이 보여준 투쟁은 일제의 지배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3월부터 2개월에 걸쳐 전국에서 200만 이상의 조선 민중이 3·1운동에 참여하였다. 전국 232개 부(府)·군(郡) 중 229개 부(府)·군(郡)에서 1,491건의 시위가 일어나 160군데 이상의 일제 통치기관을 공격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과 군인들은 물리력을 총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일제의 통계에 의하면, 1919년 3월 1일에서 5월 말까지 학살된 조선인이 7,979명, 부상자가 15,961명, 검거된 사람이 46,948명에 이르렀다. 학살, 방화 등 초토화 작전으로 자행된 유혈 탄압으로 4월말에 들어 반일투쟁은 점차 축소되었다.

3·1운동은 국제정세의 영향도 받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조선 민중의 저항과 독립열망에서 비롯되었다. 3·1운동은 민족의 힘을 바탕으로 운동을 책임질 지도조직이 없이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러한 각성은 민족해방운동의 지도 조직 건설로 이어져 임시정부 수립 계기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도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민족해방운동의 저변을 확대했다는데 있다. 운동과정에서 나타난 노동자, 농민들의 독립의지는 민족해방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더욱 확장시켰다.

** 관련 오류사례(외국 교과서) **

미국,「세계의 문화: 전 세계적 모자이크」(World Culture: A Global Mosaic), Iftikhar Ahmad, Herbert Brodsky, Marylee Susan Crofts, Elisabeth Ellis, 프렌티스 홀(Prentice Hall) 출판, 2001 “1919년 3월 1일에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의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일본인들은 이에 대응하여 2,000여명의 한국인을 죽이고 19,000여명을 투옥시켰다.